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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5일의 마중 - [리뷰] 항상 당신 곁에 머물렀어요

효준선생 2014. 10. 12. 07:30





 어떤 영화?   시대가 도려낸  어느 가족의 가슴 시린 이야기





바다 건너에 있는 중공이라고 불리던 나라의 70년대, 죽의 장막을 드리운 그곳에 붉은 혁명의 기운이 넘실대며 한 사람만의 통치가 시작된 지도 벌써 몇 년째. 여전히 사람들은 뭔지 뭐를 두려움에 휩싸여 있다. 소위 부르주아 교수라는 딱지가 붙어 은신을 거듭하던 한 남자. 그리고 그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내와 어린 딸. 그들의 아린 가족사를 들여다보고 왔다.






혁명가극은 당시 거의 유일한 공연 예술이었다. 홍색낭자군이란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열심히 무도에 열중인 딸. 시대상을 반영하는 장면이 흐르고 나타난 한 남자의 모습은 세월이 덧씌운 사상의 굴레에서 찌든 모습이다. 그게 이 세 사람의 운명을 결정짓는 순간이었다. 원하지 않는 이별, 그리고 버석거리는 해후, 사람의 정성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는 과정을 통해 영화 5일의 마중은 어느덧 딱딱해져 버린 심장에 촉촉한 비를 내리게 할 것이다.






중국의 문화 대혁명의 발발은 한 정치인의 독단적인 선택이었지만 그건 정치적 범위에 머무는 수준이 아니었다. 옛 것과 서구의 것들은 모조리 부정되었고 그건 사라져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들이 가진 물리력과 정보력은 모든 국민들을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고 거기서 숨이라도 쉬고 살려면 아무 것도 본 것 없고 아무 것도 들은 것 없고 아무 것도 말해서는 안되었다. 소위 반동분자가 되지 않으려면 반동분자로 몰린 자들을 결코 두둔하거나 너무 하지 않느냐며 항변해서는 안 된다. 설사 가족이라 할지라도. 그게 그 당시를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영화 5일의 마중은 그렇게 헤어져야 했던 남편을 기다려다 정신적 충격을 받고 기억 상실증에 걸린 어느 중년 여성의 모습과 그런 아내와 엄마를 곁에서 지키는 남편과 딸의 모습을 그린 따뜻하다 못해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드라마다. 오랜만에 장예모 감독과 다시 손을 잡고 나온 공리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였고 그 당시를 적확하게 묘사한 미술은 크게 흠잡을 바 없었다.






90년대의 중국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스치듯 보이는 주인공 뒤의 배경에 눈길이 갔다. 가진 것이 정말 없어 폐품처럼 보이는 작은 것 하나가 어렵사리 사상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살아남은 그들의 곁에서 일상의 보조재로 함께 하는 모습들이 애틋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 보다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왔음에도 그들 가족이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건, 문화 대혁명이 그저 10년의 정치적 난동이 태풍처럼 왔다간 것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적시한다. 그 사이 사람들을 할킨 상처는 아내처럼 기억을 잃은 상태가 되었고 이웃을 통해 여전히 가족 곁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말한다.






아내가 매월 5일이면 직접 역으로 나가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장면은 반복되는 데도 묘한 감정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명장면들이다. 그곳에서 단장(斷腸)의 이별을 했고 이미 돌아와 있는 남편을 기억하지 못한 채 서성거리던 모습에선 낮은 탄식을 하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전과 달리 깔끔하게 단장된 새 역사(驛舍)앞에서 기다라고 있는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이젠 정말 돌아올 수 없는 남편을 기다리는 모습처럼 보였다. 과연 이 장면을 통해 감독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한동안 거장 장예모의 연출 영화라 해도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중국 당국의 주선이나 홍콩 자본을 끌어들여 막대한 스케일로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었지만 그런 영화는 그가 아니어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창기 영화들,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그런 영화가 그리웠었다. 그리고 드디어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자신이 문화 대혁명의 최대 피해자이자 수혜자였기에 그가 뽑아낸 이번 영화들의 장면들은 어쩌면 그의 가족사나 지인의 모습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정치적 사건은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사라지게 마련이다. 주동한 사람이 사라지면 생각이 다른 사람에 의해 희석이 되든 혹은 변질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시절을 보낸 사람들의 슬픈 고난은 결코 기억에서 지워낼 수가 없다. 딸이 아버지의 사진을 무참히 도려낸 장면을 보면, 바로 이 부분을 묘사하고 싶었던 것 같다.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런데도 남의 일 같지 않다. 비슷한 정서를 나눌 수 있는 두 시간이었다.






역 앞에서 아내는 남들처럼 남편의 이름을 적은 푯말을 들고 서있다. 거기에 적힌 이름이 예사롭지 않다. 루옌스[陸焉識], 뜻을 풀이하자면 '나라가 어찌 알겠는가 (개인의 아픔을...)' 이란 의미다. 장예모 감독의 야성이 다시 살아나기를 간절히 바란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