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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킬 유어 달링 - [리뷰] 괴짜 천재들의 어느 지난 날

효준선생 2014. 10. 1. 07:30





 어떤 영화? 소위 비트 세대의 탄생을 조명한 실존 인물들의 이야기




미국이 승전국이 되기 직전, 벌써 수십 년 동안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미국인들에겐 피로감이 쌓이고 있었다. 그 즈음 소위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선 데카당스 사조가 마치 신조류라도 되는 양 받들어졌고 이를 기반으로 비트 세대라는 말이 유통했다. 하지만 그들의 삶 자체가 퇴폐적이진 않았던 걸로 보인다. 그들이 내건 기치는 기존의 구 질서를 혁파하고 개인이 사회의 부속품처럼 여겨지는 것에 대한 반항 정도로 보인다. 그리고 이들 중심엔 명문 콜롬비아 대학 출신의 앨런 긴즈버그와 루시엔 카, 그리고 잭 케루악 등이 있었다.






영화 킬 유어 달링은 1940년대 중반에서 50년대에 이르기까지 지식청년들에 의해 전파되고 공유했던 가치관을 담은 드라마다. 그들의 삶 자체가 마이너리티한지라 영화의 색감 자체도 잿빛에 가까워 보였다. 이들 실존 인물들의 질풍노도와 같은 청춘을 배우들은 실감나게 연기하고 이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아연한 일들의 연속은 쉽지는 않지만 이해가 안되는 수준이 아님은 확인할 수 있었다.






영화 제목은 글쓰기 첫 번째 조건으로 자신의 사적 감정을 배제하는 의미다. 예전 작문 수업 시간에 담당 교사는 ‘나는’으로 시작하는 글을 모두 0점 처리를 해서 학생들을 놀래켰다. 왜 모든 글의 시작엔 ‘나’ 는 들어가서는 안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고 당시의 영향인지 글엔 가급적 ‘나’, ‘필자’ 따위의 1인칭 대명사는 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사적 감정을 맨 앞에 드러내고 나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한다는 이유에서라고 했다. 그 편견이 아직도 유효한 건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그런다고 사적 감정이 담기지 않는 글이란게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고.






아무튼 괴짜들은 글을 통해서 서로를 이해한다. 이미 쓰여진 글을 통해 가감없이 난도질을 하고 대개의 어른들이 좋은 명문이라 한 것도 그들에겐 한낱 흰 종이에 검은 글씨에 불과했다. 영화 중반에 나오는 도서관 습격사건을 통해 그들이 내세운 ‘작품’들은 외설에 가까운 것들로 그들이 얼마나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반감을 갖고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이들 사이엔 애매한 감정의 골이 있다. 특히 중심에 있는 루시엔 카는 거의 신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자유와 방종을 오고 가며 일행들을 자신 수준의 영역으로 끌어 들이고 그것도 모자라 결국 끔찍한 행동까지 범하고 만다. 그럼에도 이들이 자신들의 사고로 세상과 함께 호흡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전후 세대의 혼란기와 국가와는 다른 개인의 가치에 대해 이 영화는 소위 먹물들을 전면에 내세운다. 국민은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말은 결코 통하지 않았고 사회 질서를 위한 규범 따위가 이들 머리 속에 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전쟁 종식을 위한 마지막 통집령과 아련하게 들리는 재즈 선율이 오락가락 하던 라디오 소리와 소설 한 편을 두고도 퇴학과 천재 소리를 동시에 들어야 했던 어느 지식 청년의 입장이 애매하기만 했던 당시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루시엔 카로 나오는 데인 드한의 서늘하면서도 우수에 찬 눈빛, 그리고 문학청년의 시름을 잘 담아낸 다니엘 래드클리프는 마치 이성 연인의 모습처럼 잘 어울린다. 두 배우의 줄탁동시는 농염하면서도 쓸쓸해 보인다. 툭하고 건들면 바로 터질 것 같았던 시절, 치기어린 행동의 나열정도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는 게 낫다고 여긴 이들의 모습이 몇 세대 전 이야기만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로 비장하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