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더블 : 달콤한 악몽 - [리뷰] 내 밖의 또 다른 나를 향해

효준선생 2014. 9. 19. 07:30





 어떤 영화? 세상에는 분명 자기만의 자리가 있다. 탐하지 말지어다.




프로이드는 그의 성격구조 이론에 따라 원초자아, 자아, 초자아로 나누어 사람의 심리를 논한 바 있다. 이것들은 한 사람에게 단 한 개씩 적용되는 것도 아니고 때와 환경에 따라 카멜레온처럼 변화무쌍하게 작용한다. 특히 타인과의 관계가 살아가는데 엄청난 동력으로 작용하는 현대에 와서는 더 심각한 수준이다.






태어난 지 1년 쯤 아이에게 거울을 비춰주면 어떤 아이들은 거울 속의 자기 모습을 자신이라고 인지하는 반면, 또 어떤 아이는 인지하지 못한 채 울음을 터뜨리기도 한다. 거울을 보는 행위가 반복되면 겉으로 보이는 외모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머리로만 느낄 수 있는 자아의 뭔가를 눈으로 파악하는 시점이 찾아온다.






한창 바쁠 때 우리는 ‘몸을 둘로 쪼갤 수도 없고’ 라며 하소연한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그렇게 나눠진 자신의 분신이 마치 자신의 아바타처럼 시키는 일은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편의성이 앞서, 부작용은 염두해 두지 않는 불상사가 벌어질 것이다. 러시아의 대 문호 도스도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분신을 통해 벌써 100여 년 전 자신을 쏙 빼닮은 반쪽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고 영화 더블: 달콤한 악몽은 바로 이 소설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텅빈 자리가 수두룩한데도 자기 자리라며 일어나라고 하는 괴상한 일이 지하철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 지하철에서의 황망함 탓에 자신의 아이디 카드를 분실하고 그로 인해 사이먼은 졸지에 없는 회사 안에서 없는 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원래 붙임성도 떨어지는 그에게 닥친 건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에 대한 불안감이 아니라 미모의 회사 동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어떻게 전달될까에 궁금증이었다. 그러던 중 자신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제임스가 등장하고 그가 만들어 놓은 영역이 마치 자신과는 정 반대의 기류를 형성하기 시작하고 이내 혼란에 빠지고 만다.






이 영화는 일단 분위기부터 심상치 않다. 60년대에서 70년대, 눈여겨 보면 마치 독일의 공장을 연상케 하는 회사 사무실등, 그 안에서 마치 일개미들처럼 노동자로 살아가는 모습들이 모노톤으로 그려진다. 그 뿐만 아니다. 긴 호흡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순간적으로 전환되는 장면들과 인물들 사이에서의 비정형적인 대사처리들은 흔히 만날때 수 있는 잘 짜여진 기승전결의 구도와도 거리가 있다.






사이먼은 조직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캐릭터다. 특히 상사는 그를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심지어 흑인 경비까지 하대를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단단히 잘 못되었구나 싶다. 그러나 이런 장치를 심어놓은 이면엔 그와는 정반대 성격의 소유자 제임스의 등장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들이다. 이름을 보면 눈치를 챌 수 있다. 제임스 사이먼과 사이먼 제임스, 나중엔 누가 누군지조차 헷갈리는 일도 발생한다. 그 두 사람이 마치 한 사람인 듯 협업을 하다가도 나중엔 천하에 둘도 없는 라이벌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 한 명의 심리가 이드와 에고를 수시로 넘나들며 표변하는 걸 상징한다.






영화는 대단히 키치적이고 유니크하다. 어디서도 쉽게 보기 힘든 장르의 영화며 익숙하지 않은 내러티브의 구조 상 몰입이 쉽지 않다. 하지만 끝으로 몰아가는 수단이 제법이다. 마치 두 사람 중에 한 명을 선택하지 않으면 못살겠다는 강박마저 느껴졌다. 어차피 공존할 수 없는 존재였다면 인위적으로라도 정돈하는 게 옳지 않았나 싶다. 자아가 분열되면 그게 병이 되고 약으로 치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두 개의 캐릭터에 스스로를 대입하다 보면 지금의 자기 모습도 어느 정도는 나올 것 같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