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 [리뷰] 사춘기 소년때의 감상으로

효준선생 2014. 8. 7. 09:00






 한 줄 소감 : 책읽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도 좋은 소식, 앞으로도 계속되었으면 함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김유정의 봄봄, 그리고 현진건의 운수좋은 날을 순서대로 놓고 보니 원작 소설을 읽은 순서로는 봄봄이 가장 먼저였다. 그때가 아마 사춘기였던 걸로 기억된다. 남녀의 사랑이 뭔지, 결혼을 한다는 것에 대해 한번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던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열 두 살 소녀와 그녀를 지켜만 봐야 했던 더벅머리 총각의 안타까운 연애사가 달뜨게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그저 결혼을 시키지 않으려는 점순이 아빠가 얼마나 얄밉던지, 하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인력착취에 해당하는 그런 모습들이 일제의 조선 민초들에 대한 현혹이었음을.






애니메이션 소중한 날의 꿈을 인상깊게 봤던 몇 년전, 총감독이라 할 수 있는 안정훈, 한혜진은 이번엔 한국 근대 소설 중에서도 손꼽히는 작품 셋을 영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영화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이 그것이다. 각각 25분에서 30분 남짓의 옴니버스 스타일의 이 영화를 보면서 읽은 지 수 십년은 된 원작 소설의 구절들이 두둥실 떠올랐다. 예전엔 그저 소년의 감상에 의거했거나 혹은 시험에 나온다고 해서 분석을 하고 문제의 지문으로 대했다면 이번엔 활자가 아닌 그림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가장 먼저 나오는 메밀꽃 필 무렵은 25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 쉽지 않다. 봉평장에서의 가벼운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사건 사고도 없고 세 명의 장돌뱅이들이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 밭 사이를 지나는 것 말고는 크게 부각되는 점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과거에 있었던 구부정한 노인네의 흰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그걸 마치 남 이야기 듣는 듯한 젊은 장돌뱅이와의 모종의 관계를 환기하는 포인트에 주목할 수 밖에 없다. 원작 소설에서 난데 없이 제천장을 가겠다는 말에 다들 아연하는 모습이 이번 영화에서도 의미있게 들린다. 어쩌면 혼란기 시절을 겪으며 분산된 가족의 끈을 이어주려는 작가의 마음이 잘 살아난 장면이다.






이어지는 영화는 김유정 원작의 봄봄이다. 잘 알려진 바대로 아직 어린 여자아이가 키가 크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혼을 못하게 막고 그 대신 머슴처럼 데릴사위 노릇을 하는 남자이야기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점순이라는 캐릭터를 소설이 아닌 그림으로 보니 저 당시엔 저런 얼굴도 호감형이었을까 하는 짓궂은 상상력이 들어서였다. 대충 할머니 뻘인 점순이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았고 그녀가 머뭇거리는 남자를 향해 톡쏘듯 내뱉는 말들이 조선시대때의 여염집 처녀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이번 영화에서 가장 심금을 울린 건 바로 마지막에 자리한 현진건 원작의 운수 좋은 날이다. 이 영화가 좋았던 건 시골이라는 제한된 공간을 빌어오면 끝인 앞의 두 편의 영화와는 달리 당시 경성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았다는 점이다. 아픈 아내를 두고 돈을 벌기 위해 인력거를 끌고 나간 어느날, 아내는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날 장사가 잘되는 통에 흥분한 인력거꾼 김첨지, 그가 친구와 술집에서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싸래기 눈이 내리는 날임에도 손님이 몰리는 걸 보면서도 문득 집에 남겨둔 아내 생각을 하는 장면이 마음이 아팠다. 무엇보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당시의 모습들, 전차가 다니고 행인들의 옷차림, 술집의 풍광들은 꼼꼼한 사전 조사와 고증이 없었다면 재현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지금은 시멘트로 도배를 하는 걸로 서울의 옛 모습을 지우는 데 혈안이 된 것과 비교하면 그 또한 이 영화를 감상하는 포인트가 된다.






이 영화는 책 읽기 싫어하는 아이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는 좋은 컨텐츠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원작들이 이런 방식으로 널리 보급되면 좋을 것 같다. 심훈의 상록수나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등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무수하다. 애니메이션은 무엇보다 사람의 손끝이 필요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여러 원화 작가들의 노고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2014)

9.6
감독
안재훈, 한혜진
출연
장광, 남상일, 박영재, 이종혁, 엄상현
정보
애니메이션 | 한국 | 90 분 | 2014-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