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해무 - [리뷰]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있다

효준선생 2014. 7. 29. 07:30






   한 줄 소감 : 만선의 꿈,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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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을  두 해 남긴 1998년의 시작은 음울했다. 바로 전 해 연말 터진 외환 위기로 온 국민에게 IMF체제가 마치 굴레처럼 덧씌워졌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통지를 받으며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그나마 가진 재산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겐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환율과 금리 덕에 환차익과 이자수입으로 버틸 수 있는 언덕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이 한달 벌어 한달 먹고사는 월급쟁이들에겐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드디어 한국이 외환위기의 덫에서 풀려났다고 자축했지만 동참할 수 없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런가 싶어 자괴감에 빠지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어두운 그림자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채 가시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이번엔 배다. 작년 설국열차라는 환영열차(幻影列車)를 내세워 오로지 단 한곳에서만의 삶을 조밀하게 들여다보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던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 영화 살인의 추억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였던 심성보 감독과 함께 인간의 본성이 펄펄 끓어 넘치는 또 하나의 역작을 이끌어냈다. 영화 해무, 재작년 극단 연우무대의 작품으로 동명의 연극을 관람한 바 있었다. 무대를 가득채운 이동식 선박을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선원들의 이야기를 자못 충격적으로 그려낸 그 작품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겼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연극과 비교해 영화에선 스케일이 더 커졌고 디테일도 강화되었다. 특히 연극에선 불가능했던 조선족 밀항자들을 대거 출연시킬 수 있었다.






‘전진호’는 이제 세월을 뒤로하고 폐선의 위기를 맞고 있다. 노후화된 채로 만선은커녕 기름값도 건지지 못한다고 선주는 투덜대고 선원들도 풀이 죽은 상태다. 이 배에 생존을 건 그들에게 배는 자신들의 목숨이요, 집인 셈이다. 집을 잃고 벌이를 잃는 위기 속에 그들은 최후의 항해를 나선다. 그리고 그들이 잡아 들여야 하는 건 물고기가 아니라 중국에서 밀항한 조선족들이다. 애초 그들에겐 밀항이 가지고 있는 불법의 엄중함 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선장이 나눠주는 목돈에 감읍할 따름이었다. 공해상에서 중국배에서 건너온 그들을 보면서도 큰 심적 갈등이나 부담감은 없었다.






사람 마음 속엔 수 백개의 능구렁이가 사는 모양이다.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는 순간,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위기로 작용할 것 같은 순간, 품에 안지 못하고 내치려고 하는 건 동물적 본능인 모양이다. 전진호 선원들의 면면들에게선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각각을 볼 수 있었다. 우선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배 위에서의 위기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치명적 사태를 말한다. 아무도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 선상,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몸을 감추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 마지막 절규라도 해야 마땅하지만 우선 자기부터 살고자 하는 생각들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이 영화는 생존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신의, 그런데 한 명의 캐릭터 만큼은 예외다. 박유천이 맡은 동식이라는 캐릭터는 연극때도 그랬지만 극의 흐름을 일방으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할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다. 남들은 모두 자기 살 궁리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조선족 처자를 구하려는 마음은 어쩌면 인간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못할 마지막 측은지심이나 긍휼이 아닐까 싶다.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라 하기에 그들이 쌓아올린 하룻밤 만리장성의 길이가 너무나도 짧고 제 목숨마저도 담보하기 어려운 지옥도 같은 그곳에서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데 매진할 수 있겠는가.






15년 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환기해 보자. 나라의 금고가 텅텅비게 만든 건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렇게 된 뒤 국민들이 보여준 열의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장롱에 모아온 금붙이를 죄다 꺼내왔으며 부실기업들을 살리는데 막대한 공적자금이 들어감에도 누구하나 큰 목소리로 반대하지 않았다. 노숙자들이 지천이고 그들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구걸을 하는 상황에서 식당 주인들은 내치지 않고 밥 한술을 떠주곤 했다. 하지만 변한 건 그것뿐이었다. 전진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름을 바꿔 대한민국호라면 우리는 선상의 선원과 피치 못해 올라탄 외부인들을 가득 실은 채 어디로 가고 있나 바다안개에 갇힌 채 좌표도 잃고 닻도 잃고 선장도 잃은 채 부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영화는 강력한 휴머니티를 뿜어낸다.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군상들이 별것도 아닌 계급의식을 드러낸 채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약자를 향해선 물리적 폭력도 가한다. 어리석은 인도(引導)로 몰살의 위기도 겪고 망망대해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적인 행각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다. 그들을 탓할 수만도 없다. 그 배는 그들에겐 마지막 거소이자 비빌 언덕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먹먹함은 스크린 속을 장악했던 짙은 바다안개처럼 강렬하게 극장 안으로 채우고도 남았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해무 (2014)

9.6
감독
심성보
출연
김윤석, 박유천, 한예리, 이희준, 문성근
정보
드라마 | 한국 | 111 분 | 2014-0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