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소감 : 만선의 꿈, 만신창이가 되어 버린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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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을 두 해 남긴 1998년의 시작은 음울했다. 바로 전 해 연말 터진 외환 위기로 온 국민에게 IMF체제가 마치 굴레처럼 덧씌워졌고 멀쩡하게 다니던 회사에서 해고통지를 받으며 거리로 나앉게 되었다. 그나마 가진 재산이라도 있는 사람들에겐 고공행진을 거듭하던 환율과 금리 덕에 환차익과 이자수입으로 버틸 수 있는 언덕이라도 마련할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없이 한달 벌어 한달 먹고사는 월급쟁이들에겐 도무지 빠져나갈 수 없는 생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몇 년 뒤 드디어 한국이 외환위기의 덫에서 풀려났다고 자축했지만 동참할 수 없는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자기들만 그런가 싶어 자괴감에 빠지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시작했고 그런 어두운 그림자는 15년이 지난 지금도 채 가시지 않은 채 이곳저곳을 떠돌고 있다.
이번엔 배다. 작년 설국열차라는 환영열차(幻影列車)를 내세워 오로지 단 한곳에서만의 삶을 조밀하게 들여다보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들었던 봉준호 감독은 이번에 영화 살인의 추억의 공동 시나리오 작가였던 심성보 감독과 함께 인간의 본성이 펄펄 끓어 넘치는 또 하나의 역작을 이끌어냈다. 영화 해무, 재작년 극단 연우무대의 작품으로 동명의 연극을 관람한 바 있었다. 무대를 가득채운 이동식 선박을 배경으로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선원들의 이야기를 자못 충격적으로 그려낸 그 작품을 어떻게 영상으로 옮겼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연극과 비교해 영화에선 스케일이 더 커졌고 디테일도 강화되었다. 특히 연극에선 불가능했던 조선족 밀항자들을 대거 출연시킬 수 있었다.
‘전진호’는 이제 세월을 뒤로하고 폐선의 위기를 맞고 있다. 노후화된 채로 만선은커녕 기름값도 건지지 못한다고 선주는 투덜대고 선원들도 풀이 죽은 상태다. 이 배에 생존을 건 그들에게 배는 자신들의 목숨이요, 집인 셈이다. 집을 잃고 벌이를 잃는 위기 속에 그들은 최후의 항해를 나선다. 그리고 그들이 잡아 들여야 하는 건 물고기가 아니라 중국에서 밀항한 조선족들이다. 애초 그들에겐 밀항이 가지고 있는 불법의 엄중함 따윈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선장이 나눠주는 목돈에 감읍할 따름이었다. 공해상에서 중국배에서 건너온 그들을 보면서도 큰 심적 갈등이나 부담감은 없었다.
사람 마음 속엔 수 백개의 능구렁이가 사는 모양이다. 사람이 아니라 돈으로 보이는 순간,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에게 위기로 작용할 것 같은 순간, 품에 안지 못하고 내치려고 하는 건 동물적 본능인 모양이다. 전진호 선원들의 면면들에게선 다중인격장애를 가진 사람의 각각을 볼 수 있었다. 우선 그 어디로도 도망칠 수 없는 배 위에서의 위기란 자신이 죽지 않으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치명적 사태를 말한다. 아무도 자신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국 배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승자가 될 수 밖에 없다.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 선상, 마치 숨바꼭질이라도 하듯 몸을 감추지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들이 마지막 절규라도 해야 마땅하지만 우선 자기부터 살고자 하는 생각들 앞에선 무용지물이다. 이 영화는 생존을 다루고 있다. 그것도 남이 아닌 자신의, 그런데 한 명의 캐릭터 만큼은 예외다. 박유천이 맡은 동식이라는 캐릭터는 연극때도 그랬지만 극의 흐름을 일방으로만 흐르는 것을 경계할 수 있는 유일한 캐릭터다. 남들은 모두 자기 살 궁리만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조선족 처자를 구하려는 마음은 어쩌면 인간이 그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못할 마지막 측은지심이나 긍휼이 아닐까 싶다. 애틋한 사랑의 감정이라 하기에 그들이 쌓아올린 하룻밤 만리장성의 길이가 너무나도 짧고 제 목숨마저도 담보하기 어려운 지옥도 같은 그곳에서 타인의 목숨을 지키는데 매진할 수 있겠는가.
15년 전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일들을 환기해 보자. 나라의 금고가 텅텅비게 만든 건 위정자들의 책임이 크다. 그런데 그렇게 된 뒤 국민들이 보여준 열의는 세상을 놀라게 했다. 장롱에 모아온 금붙이를 죄다 꺼내왔으며 부실기업들을 살리는데 막대한 공적자금이 들어감에도 누구하나 큰 목소리로 반대하지 않았다. 노숙자들이 지천이고 그들이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구걸을 하는 상황에서 식당 주인들은 내치지 않고 밥 한술을 떠주곤 했다. 하지만 변한 건 그것뿐이었다. 전진호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게 된다. 이름을 바꿔 대한민국호라면 우리는 선상의 선원과 피치 못해 올라탄 외부인들을 가득 실은 채 어디로 가고 있나 바다안개에 갇힌 채 좌표도 잃고 닻도 잃고 선장도 잃은 채 부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영화는 강력한 휴머니티를 뿜어낸다. 제한된 공간에서 인간군상들이 별것도 아닌 계급의식을 드러낸 채 거들먹거리기도 하고 약자를 향해선 물리적 폭력도 가한다. 어리석은 인도(引導)로 몰살의 위기도 겪고 망망대해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충격적인 행각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고 있다. 그들을 탓할 수만도 없다. 그 배는 그들에겐 마지막 거소이자 비빌 언덕이었기 때문이었다. 영화가 끝나고도 먹먹함은 스크린 속을 장악했던 짙은 바다안개처럼 강렬하게 극장 안으로 채우고도 남았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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