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경주 - [리뷰] 빛과 향이 천년고도에 퍼지다

효준선생 2014. 6. 16. 07:30







   한 줄 소감 : 인생은 정중동(靜中動)의 역작(力作)
 





한국인에게 경주는 아마 고등학교때 수학여행지로 각인이 되어 있다. 물론 잘 사는 동네 아이들은 비행기 타고 제주도로 가기도 한다지만 우리때는 거의 100% 경주행이었다. 생각해보면 학생들에게 교육효과가 있는 다른 곳도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천편일률적으로 경주로 가야했을까 그곳에서의 패턴도 대개 비슷했다. 단체로 잠을 자면 어떤 아이들 얼굴엔 매직이나 치약이 발라져 있고 아침식사는 카레밥이나 짜장밥, 점심 식사는 김밥 도시락이었다. 버스에 올라타 거기가 거기인듯한 관광지를 돌며 이런 저런 설명을 듣지만 기억에 남는 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거대한 능이 수도 없이 압도적 비주얼로 눈 앞에 나타났던 기억이 난다.





경주를 도읍지로 한 신라는 승자독식의 원칙에 따라 우리나라 고대사의 주류가 되었다. 통일 신라까지 이어지는 1,0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나라, 고구려, 백제를 병탄하고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나라, 그렇게 까지만 알고 있었지만 고구려가 아닌 신라의 통일로 한반도의 강역은 한반도 안으로 축소되었고, 대체로 수렴의 왕조이자 통일 시기의 왕성했던 기세는 점점 퇴폐와 왕권다툼의 장으로 변질되어 갔다. 그래도 지금 전제 왕국의 흔적을 그나마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곳이라면 경주를 꼽을 수 있으니 경주는 고등학생 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두 번은 다녀오곤 하는 머스트 해브 씨 아이템이다.





조선족 출신감독 장률은 더 이상 국적만으로 그의 영화를 재단할 수 없을 정도다. 그 분기점을 2008년 작품 이리로 볼 수 있다. 그 이후 그는 유독 지명에 천착하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인물들의 심리변화와 그곳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관계에 집중하며 영화를 찍어왔다. 이런 점에선 홍상수 감독의 연출과 비슷한 점도 있지만 장률 감독의 영화 안에는 해프닝이나 블랙 코미디가 아닌 무척이나 개인적인 사생활 같으면서도 사회상을 느껴 볼 수 있는 페이소스 같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가면 갈수록 한국인들의 심리를 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영화 경주의 주인공 최현 교수는 북경대에서 동북아 정치학을 가르치는 한국인이다. 아는 형의 장례식에 참석하러 왔다가 문득 선택한 경주행은 이 영화의 동기가 되지만 그보다는 뭔가 허전하고 공허함이 그들을 지배하는 가운데서도 미묘한 관계 설정이 두근거리게 만든다. 최현과 경주에서 찻집을 하는 공윤희의 관계, 공윤희와 그곳 경찰관인 영민과의 관계, 최현과 예전 애인 여정과의 관계, 마지막으로 최현과 북경에 남겨놓은 중국인 아내와의 관계등. 어찌보면 아주 단순할 것만 같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긴장과 이완을 거듭하고 있고, 서로 교차되는 순간의 어색함이 팽팽함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통속적인 애정물로 흐르는 것은 거부한다. 경주라는 지역이 가지고 있는 장점, 밤늦은 시간 조명에 따라 흐르는 능묘의 스카이라인은 여성의 가슴을 닮았고, 비오는 찻집과 비가 그친 찻집에 쏟아져 들어오는 빛의 변화는 이 영화를 시각적으로도 무척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들이 인위적이든 아니면 우연한 기회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적으로 희소한 대사와 마치 슬로비전을 보는 듯 느린 인물들의 동작을 충분히 보충해주었다.





이 영화가 마치 살고 있는 사람들의 연애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죽은 자들과의 교감도 한 몫 한다. 이 영화의 오프닝은 최현이 아는 형의 장례식에 참석한 것이고 그가 낮 시간 동안 돌아다니던 경주에서 능이 보이지 않는 곳은 없었다. 밤에는 야간 조명이 비추는 능 위에 올라가 의미있는 대사를 하는 윤희 일행의 모습도 보였다. 밤늦은 시간 윤희가 조심스레 들려준 남편의 이야기도, 최현이 북경 아내의 전화를 듣고는 길을 나서는 길에 다시 본 거리의 역술원에서의 해프닝도 바로 산자와 죽은 자의 거리가 눈에 보일 듯 하다는 걸 의미한다. 그럼에도 죽음이 상기시키는 칙칙한 이미지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 묘한 연출을 한다. 이 점이 이 영화의 특징이다.   





이 영화는 140분이 훌쩍 넘는 긴 러닝타임을 갖고 있다. 흐름도 격렬하지 않다. 주인공 최현의 동선만을 따라다닌다. 하지만 과도하게 경주를 위한 여행 가이드의 역할은 하지 않는다. 오롯이 인물들의 관계와 감정을 충실하게 담고자 했다. 박해일의 엉뚱해 보이는 동작들과 경주여신이라는 닉네임이 그다지 거북하지 않은 신민아의 협업도 좋다. 무엇보다 한때, 북경대 교수를 꿈꿨던 나로서는 간간히 들리는 중국 콘텐츠의 삽입이 무엇보다 반가웠다. 경주에 있는 정말 멋진 찻집 아리솔은 아니더라도 중국에서 가져온 차 한잔 마셔보고 싶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경주 (2014)

7.5
감독
장률
출연
박해일, 신민아, 김태훈, 신소율, 류승완
정보
로맨스/멜로, 코미디 | 한국 | 145 분 | 2014-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