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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역린 - [리뷰] 세상엔 정성만으로 안되는 일이 더 많다

효준선생 2014. 5. 11. 07:30






    한 줄 소감 : 더 많은 역사 속의 한페이지가 영화 콘텐츠가 되었으면 좋겠다. 
 





중국 고대 철학서 중, 韓非子<說難>에는 전제 왕권 시절이 도래한 뒤, 권력자에게 자신의 정견을 피력하며 한 자리를 얻곤 하던 소위 유세객의 처세에 대해 아주 잘 소개되어 있다. 그런데 세상사람들은 이 문장에서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역린을 많이 인용한다. 원 뜻은 용의 목에 있는 한 자 길이의 비늘을 의미하며 이것을 건드리지 않아야 자신의 견해로 왕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말인데, 원문이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의 방책이었다면 지금은 왕의 노여움을 받으면 바로 제 명에 못산다는 의미로 돌려쓰고 있다.





한자로만 보면 逆鱗은 거꾸로 난 비늘이라는 뜻이다. 상상 속의 동물인 용은 파충류로 받아들여지고 그에게 비늘은 권위의 상징이자 스스로를 보호하는 갑옷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딱 하나 거꾸로 난 비늘은 용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에 다름 아니다. 예로부터 용은 왕, 절대 군주의 상징이었으므로 바로 이 거꾸로 난 비늘은 왕에겐 드러내기 싫은 약점이라는 말로도 들린다.





조선왕조 역대 왕 중에서 4대 세종과 함께 22대 정조에 대한 이미지는 다른 왕들과는 달리 좋은 편이다. 이성계의 후손들은 대개가 문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데 반해 정조의 그것은 그가 치세 기간 중 보여주었던 개혁 군주의 면모와 맞물려 그렇게 평가받는 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의 곡절많은 유년시절의 아픔이 그에게 동정표를 던졌는지도 모르고,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일단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그가 이후 평탄할 것만 같았던 왕으로서의 삶에 기이한 일이 한 가지 있었으니 역사에서는 이를 정유역변(丁酉逆變)이라 했다.





조선왕조 실록 정조 4권, 1년(1777 정유 / 청 건륭(乾隆) 42년) 7월 28일(신묘) 기사에 따르면 이날 밤 존현각에서 책을 보던 정조의 귀에 발자국 소리와 쨍그랑거리는 기왓장 소리가 나 내시등을 시켜 훑어보게 하였더니 마치 도둑의 소행으로 보이는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최고 권력자에겐 그 어떤 변고도 일어나서는 안되기에 이 사건에 대해 추후 조사가 이뤄졌고, 8월 7일 도둑을 여태 잡지 못했다는 이유로 우포도대장 이주국이 파면되는 일이 있었다. 또 8월 10일에는 궁궐 담장을 수리하게 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었다. 이튿날 기록에 따르면 드디어 이찬을 옹립하고자 반역을 저지른 일당을 잡아 국문하고 처결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사건의 여파는 8월 조정을 뒤흔들어 놓았으며 여기에 연루된 범인들은 줄줄이 처형, 귀양등을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의 한 페이지가 영화로 옮겨지는 과정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수많은 인과관계와 잘못된 고증 등으로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도 크기 때문이다. 영화 역린은 1777년 정조 재위 1년 어느 여름밤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언급하면서 주목을 받고 있고 등장인물들의 드라마틱한 사연,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던 정조의 심경이 잘 어우러지며 상당한 반응을 얻는 중이다. 이 영화가 비록 단 하루, 20여 시간의 일을 시간의 흐름 순으로 나열하고는 있지만 인물들 개개인의 과거사가 오버랩 되며 볼륨을 키워놓았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실제 실록에도 언급된 자들도 있고 가상의 인물들도 많다. 그 중에서 돋보이는 인물들은 갑수와 을수로 불리는 두 남자로 이 들의 행보가 실제는 큰 역할을 차지한다. 이들의 어린 시절은 그 당시 최하계층의 빈민으로 살아야 했던 모습을 거쳐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하지만 결국은 같은 장소에서 조우함으로써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정조 이상의 위상을 선보인다.





이 영화 속에서 정조는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왕이면서도 어딘가 불안해 하거나 혹은 외로워 보이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그도 그럴 것이 사도세자이자 당시 세도가였던 노론 입장에선 영 못마땅한 인물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다는 자체가 불만으로 비춰지던 때였다. 다행히 할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받아 왕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조부의 그림자도 짙고 아직은 뭔가를 스스로 헤쳐나갈 수 있는 여력은 없던 때였다. 여기에  정조의 친모인 혜경궁 홍씨와 고부갈등을 겪고 있던 조부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따가운 눈초리도 정조로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영화의 시작은 난데 없이 배근을 자랑하며 팔굽혀 펴기를 하는 정조의 뒷태로부터다. 열심히 운동도 하고 밤새 책을 읽는 모습이 건실한 어느 왕의 모습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엔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운명같은 일에 대한 스스로의 방비가 아니었나 싶다. 특히 활을 잘 쏘는 그의 비주얼은 대단했다. 역사서에서 그가 당일 활을 쏘며 도적을 견제했다는 이야기는 없지만 충분히 그런 능력은 갖추었다고 보인다.





이 영화는 권력의 정점에 쓸쓸하게 서 있는 정조와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무척이나 조직적으로 왕 제거 작전에 나선 무리들의 움직임을 다각도로 보여주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했다. 누구는 이런 이유로, 또 다른 이는 누군가의 강권에 못이겨, 또 다른 누군가는 비록 戰線에 서긴 했지만 양심상의 이유로 흔들려하는 모습을 織造해가며 이야기를 불려놓았다. 어찌되었든 정조는 무탈했고, 그와 맞섰던 여러 인물들은 그들이 실제 인물이든 가상의 인물이든 적절하게 조치되었다.





이렇게 보면 이 영화가 역사서에 기록된 사실과 완벽하게 맞아 떨어지거나(그럼 영화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일테고) 또 완벽하게 허투로 왜곡했다고 볼 수도 없다. 역사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어 재미로만 이 영화를 봤다면 이 영화는 좀 지루하거나 늘어졌다고 판단할 수도 있다.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서이기도 하고,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배우들에게 바라는 일종의 값을 따지는 걸 우선해서 봤을 수도 있다.





老論이니 時派니 해서 이 사건을 전후로 펼쳐지는 더 다양하고 긴박한 이야기와 개혁군주로서 다이내믹한 삶을 살았던 정조의 모습에서 한국 현대사의 어느 인물을 反芻할 수 있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던 나로서는 정조 암살시도라는 하나의 사건에 집중했던 영화 역린은 좀 다른 느낌이었다. . 한비자의 역린도, 예기 중용 23장의 정성에 대한 명문도 과연 이 영화의 흐름과 적확하게 맞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봤으면  좋겠다는. 그건, 정조가 이날의 역모에 휘말려 암살당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모두가 다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멋있게 보이기 위해 끌어다 쓴 견강부회의 단어와 문장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정조에게 역린이라 하면, 자신의 부친에 대한 콤플렉스였을 테지만 (영화에선 뒤주에서 죽어가는 사도세자의 모습과 오열하는 어린 정조의 모습이 잠시 등장한다)이 영화의 주요 소재는 아니었고, 정성을 다하면 못 이룰 일이 없다고 여러 번 되뇌는 장면은 정조의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심어놓은 장치지만 개혁 군주로서의 구체적인 행보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마치 암살 기도가 정성이 부족해서 이루지 못했다며 비꼬는 것 같이 들렸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역린 (2014)

7.3
감독
이재규
출연
현빈,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한지민
정보
시대극 | 한국 | 135 분 | 2014-0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