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퓨어 - 구석에 몰린 을의 반란을 목도하라

효준선생 2013. 6. 20. 09:00

 

 

 

 

 

   한 줄 소감 : 그녀가 듣고 있던 클래식 음악이 이토록 날카로울 줄이야 

 

 

 

 

 

래식 음악을 처음 듣고는 세상의 모든 유행음악이 시시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있다면 영화 퓨어는 바로 당신의 이야기일지 모른다. 스웨덴 여자 카타리나는 별볼일 없는 평범한 20대다.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2년 정도 동거 중이고, 맞담배 정도는 피울 수 있는 엄마는 그녀에게 혹이다. 번듯한 직업이 없는 그녀에게 유튜브를 통해 접한 모차르트 레퀴엠은 신천지다. 클래식 공연을 듣고 와서는 그녀는 무작정 콘서트 홀로 찾아가 일을 하겠다고 한다.

 

 


이 영화는 여주인공만 놓고보면 타인의 의지에 휘둘릴 수 밖에 없는, 시쳇말로 “을”의 전형이다. 콘서트 홀의 책임자이자 악단의 지휘자인 아담의 눈에 그녀는 아내 부재시 애완할 수 있는 소모품일 뿐이고, 단 한번도 그런 가진 것 많아 보이는 남자의 관심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호의로 받아들여졌다. 두 사람 간의 언매치는 결국 파국을 가져오고, 그 와중에 예상치 못한 흐름은 그녀가 누르면 짓눌리기만 하는 피동적 노리개가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치정멜로라 할 수 있지만 요 근래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한국에서의 갑과 을의 관계가 기본으로 깔려 있다. 높은 자리에서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의 명령은 거부할 수 없는 자리에 있다면 그녀는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그런데 아담의 존재는 그녀에겐 다소 중의적이다. 미국 팝 음악을 듣고 친구들과 저질스런 모임을 만들고, 문화소양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는 엄마에게선 결코 감수해보지 못했던 또 다른 차원의 남자, 그가 나이 많은 중년에다 유부남이라는 사실조차 그녀는 현실적으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가 나를 좋아한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인생을 맞을 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영리한 현실감보다 앞섰던 것 같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반복적으로 좌절하는 장면이 나온다. 남자친구와 싸울때도, 혼자 거리를 쏘다닐때도, 믿었던 남자로부터 냉대를 당했을때도 그녀는 울음이 아닌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으로 그녀의 마음상태를 대변한다.


그녀의 삶은 어느정도 거짓과 모험이 필요했다. 엄마가 살아생전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면 콘서트 홀 리셉셔니스트 자리를 차지했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의 처세는 그 정도였다. 하지만 그녀가 알지 못했던 현실 속에서의 참담함은 그녀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해가는 걸 주목하고 있다. 그건 비록 제 몸 하나 누일 곳이 없어도, 한 끼 식사 조차 제대로 해결 할 수 없어도 귀에서 클래식 음악을 떼어 놓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허울을 좇는 그녀를 조명한다.

 

 

 

 

영화의 반전은 다소 충격적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도 물 수 있다고 하는데, 어쩌면 또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범죄를 두둔하려는 건 아니다. 왜곡된 관계에서 시정하기 위해 최대한의 몸부림, 그리고 그 칼날 같았던 스웨덴의 어느 시점에 그녀는 웃고 있었다. 서늘해졌다.


북유럽 정취가 물씬 풍겼다. 사위는 메마른 가지로 덮힌 침엽수에 금방이라도 폭설이 쏟아질 것 같았던 배경, 어느 20대 여자의 회오리 같았던 그 시절의 이야기는 2013년 한국의 고용시장과도 맥이 닿아 있는 것 같아 또 섬뜩했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