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콘돌은 날아간다 - 파계, 누군가에겐 자유

효준선생 2013. 5. 27. 07:00

 

 

 

 

 

 

 

   한 줄 소감 : 환속의 길은 생각보다 고난의 길이라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되었네

 

 

 

 

 

 

화 콘돌은 날아간다는 감독 전수일이 전작에서 보여준 영화문법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았다. 많지 않은 배우들, 특히 나레이션을 담당한 등장인물들의 과소함. 배경역시도 주요한 장치인 점, 많지 않은 대사와 마치 슬로비젼을 보는 듯한 느릿느릿한 움직임. 자주 보여지지 않았던 어떤 이국적 풍광과 그 안에서 구도자처럼 운신하는 주인공의 마지막 컷등.

 

 


이런 점에 익숙하지 않는 관객에겐 영화란 인내의 시간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인간과 믿음, 구원, 신의 영역 이런 주문을 걸며 보여준 그의 이번 영상에는 이번엔 약간의 충격을 가미했다. 사제로서의 신부인 남자는 겉모습만 봐서는 평범한 신부님과 달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씩 드러내는 그의 행위는 눈빛과 맞물려 이상조짐을 보인다. 어린 여학생을 여과하면서 그려지는 장면들이다.

 

 


신부는 왜 여학생에게 성당의 잔심부름을 시키고 왜 그녀를 무릎에 앉히고 사진을 찍고 왜 그녀에게 성경을 필사하도록 하는가. 수위조절을 위해서 였는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동은 구원을 내려주는 신의 사도로서 다소 애매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가 절벽에 부딪친 것, 여학생의 죽음이었다. 영화는 이즈음 본격적으로 구원이라는 화두에 매달려 본다. 고해성사를 하는 것으로 타인의 고민을 경청하던 그가, 여학생의 언니를 만나고 동생을 보살피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진 그녀에게 보다 파격적인 구원의 형식을 내민다.

 

 


구원의 방식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종교인으로서의 구원과 개인적인 파계와는 질적으로 다를 수 밖에 없다. 신부가 아닌 남자로 작용할 모른다는 설정, 그리고 그걸 구원의 다른 형식이라고 주장하는 건, 너무 어린 여학생을 통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심리적 저항선을 스스로가 깨버린 건 아니었나 싶다. 신부가 머나먼 땅 페루까지 가서 칼에 찔리고, 다른 신부에게 자신의 고통을 감해달라고 읍소하는 장면은 구원해주겠다는 그의 처지가 더 이상은 타인을 위함이 아닌 자신을 위하는 것으로 변모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 볼만한 건 여성의 몸이다. 언니의 벌거벗은 몸은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옷이라도 입혀주고 싶은 연민의 것이거나, 혹은 피부마저도 들어내보고 싶은 가학적 충동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남자와 여자의 합의된 성적 결합이라는 말인데, 미안하게도 이 영화에선 그 모두를 거부한다. 동생을 잃은 언니가 신부를 향해 옷을 벗어버린 행위와 그에 대응하는 신부의 모습이 과연 구원을 요구하는 자와 구원을 내려주는 자의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런 이유로 피를 흘려가면서도 그 먼 길을 걸어 구원의 손길을 찾아가는 신부의 모습이 가엽기도 혹은 당연시하게도 보인 것이다. 제목으로 쓰인 콘돌이 자유를 상징한다면, 이 영화에선 콘돌은 과연 누구였을까? 敎職에 갇혀 남성과 사제로서 살아가는 것에 버거워 하던 신부인지, 제 몸뚱아리를 낯선 남자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이면서 동생을 잃은 자책감을 벗어버리려 하던 여자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한 남자의 야릇한 눈빛조차도 읽어내지 못한 채 새장에 갇힌 어린 애완조처럼 살다 간 여학생이었는지, 이 영화에선 유난히도 갇힘과 풀어냄에 대한 화두가 많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콘돌은 날아간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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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전수일
출연
조재현, 배정화, 유연미
정보
드라마 | 한국 | 102 분 | 2013-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