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소감 : 정확하게 같은 연배들의 이야기, 고생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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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년 전 일이다. 기억 속에 그날엔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 서슬 퍼런 군부독재 세력들은 정권 재창출을 위해 護憲을, 민주화 세력들은 改憲을 부르짖던 그때 이듬해로 다가온 서울 올림픽은 마치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을 한 곳에 모을 수 있을 거라는 뜬금없는 기대로 서서히 달아오를 무렵, 청춘의 끝자락을 잡고는 질풍노도의 시절을 보낸 더벅머리들이 있었다. 영화 전설의 주먹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물론 25년 전 고딩들만의 이야기로 채워놓지는 않았다. 시간이 이만큼 흘렀고 불혹의 나이도 넘긴지 꽤 된 그들, 머리엔 조금씩 흰 서리가 앉기 시작하고 아이들은 어느새 자기만큼이나 키가 컸다. 부양의 의무와 가장이라는 짐이 어깨에 눌리고, 호구지책이라는 막중한 사명감에 하루하루가 힘이 들지만 세상은 이들 낀 세대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정치적 셈법인지 노인들에겐 세상의 모든 복지혜택을 맛보게 해주려고 안간힘이고 사회생활을 하자마자 백수대열에 합류한 20대들에겐 사회적 동정심이라도 발휘되지만 그 사이의, 중년도 그렇다고 장년도 아닌 이들에게 돌아오는 건 별로 없다. 간혹 시간 날 때마다 들춰보는 학창시절의 앨범 속 친구들이 떠오르지만 다들 먹고사느라 바쁘니 안부조차 하기 버겁다.
40대란 세상의 모든 유혹에도 굴하지 않은 채 뚜벅뚜벅 제 갈 길을 가는 나이라 하여 不惑이라 부르지만 요즘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선 그마저도 쉽지 않다.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 이들을 유혹하는 건 경제력이다. 아내와 사별하고 혼자서 국수집을 하는 남자, 친구 밑에서 아니꼽지만 기러기 아빠의 역할을 다하려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남자, 왕년의 실수로 감방에서 좋은 시절을 다 보내고 지금은 눈칫밥이나 먹는 건달. 이들이 바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다.
주먹 하나 만큼은 자신을 따라올 자 없다고 뻐기던 시절, 마치 도원결의라도 하듯 친구 먹었지만 지금은 얄궂게도 상금을 앞에 두고 주먹질을 해야 하는 신세다. 무도인들은 돈을 보고 싸우는 게 아니라 하지만 최소한 이들에겐 돈이 필요하다.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이들이 철창으로 둘러싸인 링 안에서 피를 흘리며 싸우는 동안 방송사는 이속을 챙기고 관중들은 투견 구경이라도 하는 양 광분한다. 또 누구는 이런 대결을 놓고 도박을 하고, 최후의 승자에게 모든 것을 걸었다는 듯 미쳐 날뛴다.
이 영화는 18살 고등학생들의 이야기와 그들이 자라서 마흔이 된 뒤의 이야기를 교차해서 보여준다. 학생 A가 어른 A 로 성장하는 사이의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지만 이 영화는 개개인의 성장담보다는 그때의 우정과 지금의 우정은 어떻게 같거나 혹은 다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매개가 바로 주먹인 셈이다.
남자들의 우정을 전면에 내세우고는 있지만 주변인물을 통해 요즘 사회문제들에 대해서도 메스를 가한다. 아이들의 왕따문제, 재벌 2세들의 뻘짓, 스포츠 도박, 노조탄압, 정보기관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꺼낸다.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 주인공들과 이런 이야기들이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건 이들의 삶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주먹을 쓰는 장면이 다수 등장하고 흔히 보았던 주먹만 쓰는 복싱수준이 아니라 K-1, UFC등 이종격투기의 대결 장면과 디테일한 기술 장면들이 다수 보여진다. 선수들이 대역으로 나오기도 했겠지만 운동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보였던 배우들이 직접 몸을 쓰고 촬영 시 많이 다치기도 했다고 하니, 실제 마흔 줄에 들어선 배우들 역시 작품 속 캐릭터에 심하게 동화되었던 것 같다.
나이 마흔, 살아온 날과 떠날 날 중간쯤에 있는 그들. 지나온 시간들을 삭제하고 싶었을 그들의 일생에서 방송사가 마련해준 “전설의 주먹”이나 “전설대전” 같은 일회성 이벤트에 의한 삶의 터닝 포인트 말고도 늘 꾸준히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기를. 오랜만에 다시 돌아온 강우석 감독은 곧 자신의 연배가 될 바로 밑 후배들에게 격려의 헌사를 보내주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전설의 주먹 (2013)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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