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청포도 사탕 - 17년전의 약속은 낙인처럼 남아있다

효준선생 2012. 9. 11. 00:04

 

 

 

 

 

약간은 섬뜩한 이야기지만 한 날 한 시에 돌발사고로 죽은 자들의 사연을 들어보면 기이한 것들이 많다. 정해진 탈 것을 간발의 차로 타지 못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 혹은 원래 그 탈 것이 아니었다가 타는 바람에 비운에 간 경우.  살아난 사람은 가슴을 쓸어내리겠지만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그 유가족의 마음은 얼마나 상처가 크겠는가.


1994년엔 유난히 크고 작은 붕괴사건이 잇달았다. 그 중에서도 그해 10월, 등교를 서두르던 학생을 가득 태운 버스가 성수대교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 안엔 특히 인근 여학교에서 통학하던 여학생들이 많았다. 여학생들의 까르르 수다떠는 소리에 운전기사가 백미러로 잠시 눈길을 주는 사이, 버스는 갑자기 가라앉았다. 강물 속으로. 이날의 처참했던 사고의 순간이었다.


영화 청포도 사탕은 두 명의 여중 동창생이 17년만에 우연히 조우하면서 겪게 되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밀도있게 그려낸 드라마다. 그리고 그 농밀함이 지나쳐 마치 퍽하고 터질 듯한 사연 가득한 이야기 구조임을 암시하고 있어 영화 뒷부분에서 설명을 하기 전까지는 도무지 그 끝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그런 이유로 이 영화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라고 하고 싶다. 나이 서른 결혼을 앞두고 약혼남과 결혼식 준비로 바쁜 은행원 선주, 그녀 앞에 아주 오랜만에 여중 동창생인 소라가 나타난다. 소라는 작가라는 이유로 성도 바꾸고 연신 담배를 피워 무는 나름 있어 보이는 캐릭터다. 그런데 그녀는 자꾸 선주의 약혼남에게 접근하며 선주를 불안하게 하고 결국 둘은 부산 사인회에 동행하며 17년 전 발생했던 그날의 비밀에 대해 서로에 대해 숨겨놓았던 비밀을 털어놓는다.


가족이나 친구의 죽음은 살아있는 자에겐 평생의 트라우마가 된다. 그것도 好喪이 아닌 돌연사의 경우, 내 잘못이 있는지 모르지만 어찌되었든 그 심적 부담은 영원히 남는다. 영화 초반에 선주와 약혼남, 그리고 소라의 삼각관계가 부각되면서 치정으로 얽히는 내용인가 싶었지만 숨은 비밀이 터져 나오는 후반부에 오면 선주와 소라의 심리적 봉합은 유한한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그냥 17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난 잊고 살았다”며 잊은 척하지만 단 한번이라도 자극만 받으면 금새 터져버리고 마는 나약함이 바로 인간의 기억이다. 영화 초반 유난히 아이를 안고 서둘러 길을 재촉하는 엄마와 선주의 곁을 지나치는 여학생의 모습들이 자주 눈에 들어왔다. 복선이긴 했는데, 그 복선이 나중엔 큰 의미로 작용한다.


여학교에 전학생이 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텃새가 분명 있는가 보다. 자기보다 얼굴도 예쁘고 원래 친했던 친구가 그 전학생에게 더 잘해주는 걸 보니 샘도 난다. 그래서 이름만 부르지 않고 성을 붙여 건조하게 부른다. 마치 난 너랑은 아주 친한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듣는 친구는 섭섭하다. 그래도 친구라도 믿었다. 운동장에서 계주 연습을 하던 중 지진이 났다. 세 친구는 서로의 손을 꼭 잡으며 운동장 바닥에 엎드렸다. 마치 땅바닥이 갈라진다 해도 이렇게 손을 꼭 잡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고 믿었다.


이 영화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감독도 여자다. 그래서라고 하기엔 부족하지만 영화의 톤도, 화면도 굉장히 안정되어 보였다. 특히 달리는 차량 안에서 바깥쪽을 찍은 장면은 유난히 빛을 발한다. 물론 배우들의 차분한 연기력도 한 몫 다했다. 여자 배우 중에서 발성과 발음이 가장 또렷한 편인 박진희와 여전히 뭔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눈빛의 박지윤의 호흡은 좋은 편이었다. 거기에 영화가 거진 다 끝날 무렵까지 이 두 명의 여자들이 밀고 당기며 시소게임을 벌이는 듯한, 과거 어느 시점의 비밀을 꽁꽁 감춰둔 채 복선과 전조만 보여주는 연출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대신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어느 정도 봉인이 해제된 채 상경하던 길에 선주가 내뱉은 한마디는 영화 전반부, 깨질 듯 아슬아슬하기만 했던 선주 커플을 바라보던 안쓰러운 시선을 뭉개버린 것 같아 아쉬웠다.


정족지세의 한 쪽이 무너져 그 흠결을 간신히 메우고 살았다면 그 나머지 한 쪽은 새로 만난 평생의 반려로 메우면 더 좋지 않았을까 딱지를 떼어 버리기만 한다고 상처에 새살이 빨리 돋아나지는 않는 법이니까    

 

 

 

 

 

 

 

 

 

 

 


청포도 사탕: 17년 전의 약속 (2012)

Grape Candy 
8.5
감독
김희정
출연
박진희, 박지윤, 김정난, 최원영, 이유미
정보
미스터리, 드라마 | 한국 | 104 분 | 201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