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피에타 - 속죄 앞에 드러낸 악마적 복수본능

효준선생 2012. 9. 10. 01:58

 

 

 

 

 

 

        한 줄 소감 : 현실이 이 영화보다는 柔和할 것이라고 믿지 못하겠다. 그래서 이 영화가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다.  

 

 

 

 

 

철제 공구로 사방이 둘러쳐진 공간, 한 남자가 휠체어에 앉아 자살을 기도한다. 삶에 대한 연민은 더 이상 없어 보이는 듯 하다. 거기까지였다. 그 남자의 삶,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또 다른 남자의 죽음이 보인다. 마치 자신의 목숨 줄로 속죄라도 할 모양이다. 사는 것의 반대말을 죽음이라고 한다면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아닌 형태는 인간에겐 지옥이다.


돈은 인간에게 무엇인가 물질에 대한 심리적 충족을 보다 강화시켜 내 것이 아닌 타인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간단한 도구, 물물교환이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던 시절엔 결코 타인의 것을 취할 요량으로 살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안분지족의 삶이 승자독식의 삶으로 변하가는 데 돈은 부싯돌이 아닌 라이터의 역할을 해냈다. 지폐한 장에 담긴 무수한 사람의 체온, 그 돈을 쥔 자들은 희망뿐이 아닌 욕심, 분노, 복수, 죽음, 그리고 회개와 속죄마저도 느끼며 살게 된다.


가난한 자들에게 돈은 유혹이다. 부잣집은 기르는 강아지도 지폐를 물고 다닌다지만 없는 사람에게는 호구지책의 수단이다. 그 결핍의 틈을 노리고 들어오는 사람들. 그들 역시 돈이 가진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신 상대의 약점을 알고 물어늘어지면 빌려준 돈 보다 더 많은 돈을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얻어낼 수 있음을 알고 있을 뿐이다. 제도권 은행, 제2 금융권, 사채업자. 겉으로 한 포장만 다를 뿐이고 시간이 지나 가해지는 물리적 압박은 똑같다. 누가 좀더 폭압적이고 직접적인가만 다를 뿐이다.

 

 

 

 

 

 

 

영화 피에타, 김기덕 감독이 영화만 만들었다 하면 화제를 불러일으키지만 사람들은 이번엔 또 무슨? 이라면 곁눈질만 해왔다. 그의 작품을 영화관에서 보기도 힘들었다. 으레 안 팔릴 영화라고 처음부터 못질을 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런 탓에 암암리에 보고 나서 떠도는 소문에 사람들은 그의 영화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대지만 대체 영화를 보기는 본 걸까? 어제 새벽 베니스에서 낭보가 날아들었다. 최고의 대상인 황금사자상의 주인공이 되었단다. 기쁜 일이다. 극장가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휴일인 오늘 비록 많지 않은 상영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러 왔다. 수상의 영향일까 아니면 악마같은 인간의 본성에 대해, 혹은 입소문으로 떠도는 결말의 충격파를 몸소 확인하고 싶어서였을까? 어떤 것이든 좋다. 자기 영화를 만들어 온지 십수년, 같은 영화판 사람들 마저도 뜨악해하는 그의 다음 작품이 이번을 계기로 한결 대중곁으로 다가설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는 전작들과 달리 대중 친화적이던가? 소위 센 영화 전성시대다. 사람들은 시대가 하수상한 지라 이런 영화들이 잘나간다고 하는데, 오히려 전작들보다는 부드러웠다고 생각된다. 그의 영화 중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사건을 휘몰아치거나 충격적 장면이 끝나면 멍하니 생각할 수 있는 휴지기를 집어넣는다. 먼 산이나 강이나 들판이나 건물들... 그런데 이번에 텀이 없이 집약적으로 몰아갔다. 대신 에피소드들을 반복적으로 조합시켰다. 사채업자 똘마니로 나오는 주인공 강도는 청계천 공구상가 영세업자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고리대를 뜯는 일을 한다. 영화에선 그 장면을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잔인성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두들겨 패고 팔을 기계에 넣어 짓이기고 건물에서 집어던져 다리병신을 만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들 말고 다른 경우엔 자신들이 스스로 외부로부터의 겁박에 못 이겨 알아서 처신했다. 이런 것들이 모두 모이면서 강도는 말 그대로 악마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역시도 호구지책을 위해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하수인에 불과할 뿐이다. 그보다 그는 일이 끝나면 살아있는 닭을 사다 삶아먹고, 장어, 생선, 토끼등이 그의 곁을 맴도는 장면이 보다 흉악하고 불안했다.

 

 

 

 

 

 

영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장소는 청계천 공구상가다. 허름하다. 녹슨 쇠 냄새가 스크린밖으로 배어 나올 지경이다. 코가 무를 것 같다. 그런데 그 감방같은 그곳에서 장사도 안되고, 빚 독촉에 죽지 못해 살아갈 뿐이다. 그리고 이내 죽음을 생각하지만 그 죽음의 길목에 강도가 서있을 뿐이다. 죽겠나? 아니면 병신이 될 터인가? 지금도 존재하는 청계천 공구상가는 한때 대한민국에서 못 만드는 물건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살아가던 소규모 자영업자들의 천국이었다. 그곳의 철공소 주인과 부품상이 힘을 합치면 탱크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청계천 공사로 삶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었다. 하나 둘 흩어지고 이제 남은 그들은 “강도”앞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한다.


영화의 주제를 복수와 속죄로 봐야 하는 걸까 아님, 모성에 대한 희구로 봐야 할까?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낯선 여자는 영민한 편이다. 그러나 제 목숨 같았던 “그”를 보내고 취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영화를 보고 난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살아서 잘살지...” 하지만 사회계급의 저층을 교교히 흐르는 동물과 다름없이 서로를 물고 뜯어먹어야 하루를 버티는 폭압적 인간관계앞에서 더 이상의 선택도 없어 보인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을 잡아먹을까”라고 하지만 영화는 “인간은 늘 그래왔다”고 주장한다.

 

 

 

 

 

 

 

강도는 악마 이상으로 센 놈으로 그려진다. 그를 맞선 사람들은 알아서 주저 않는다. 마치 커다란 맹수 앞에서 멍멍짖다 깨깽거리는 강아지처럼, 하지만 그의 심경의 변화는 홀연히 등장한 엄마 때문만은 아니다. 그녀가 엄마가 아니었어도 상관없어보였다. 동생이나 먼 친척이었어도 그는 비슷한 선택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지켜야할 대상이 생겼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는 좀 다른 행동을 한다. 물러진 것이다.


영화는 엄마와 아들이라는, 아빠와 딸과는 좀 다른 관계를 설정한다. 자신의 배속에서 자라고 자신의 음부를 통해 세상으로 배출해낸 자식이라는 관계 속에서, 그 자식이 자라면 또 하나의 남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아슬아슬한 관계로 확장될 수도 있다는 설정을 깔아놓았다. 그런 장면도 나왔다. 그리고 롤러코스터가 최곳점을 지나면서 강도는 예전의 강도의 모습이 아닌 모습으로 변해갔다. 강도가 웃는 장면이 단 하나에서 등장한다. 그 웃음은 “난 더 이상 예전처럼 살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처럼 보였다.

 

 

 

 

 

 

흥미로운 것은 영화에서 강도에서 한 차례이상 당했던 사람들이 극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만신창이의 모습이다. 강도가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하지만 그들은 강도를 향해 복수의 마음조차 품을 수 없었다. 복수는 이제 한 사람의 몫이 되었고, 그 복수의 끝은 후련함보다 끝끝내 풀리지 않을 미련의 회한같은 것이었다.


엔딩장면을 충격적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정말 궁금했다. 과연 차를 몰고 가는 여자는 알지 못한 것일까? 덜컹거리는 그 묵직한 이물감을? 그게 더욱 무서웠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라 그런 추정도 가능한 일이다.

 

 

 

 

 

 

 

 

 


피에타 (2012)

9.1
감독
김기덕
출연
조민수, 이정진, 우기홍, 강은진, 조재룡
정보
드라마 | 한국 | 104 분 | 2012-0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