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모피를 입은 비너스 - 가학과 피학의 경계선에서 흔들리다

효준선생 2012. 7. 4. 00:26

 

 

 

 

피학적 성적 강박을 일컫는 매저키즘의 원류가 된 오스트리아의 작가 레오폴트 혼 자허마조흐의 소설, 모피를 입은 비너스가 동명 타이틀로 영화로 나왔다. 이 영화를 보기 전 에로틱 스릴러적 외피를 보여주는 포스터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 영화는 에로틱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외설적이라는 생각은 그다지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인간관계에서의 굴종과 모욕, 그리고 파국적 결말에 대해 두어 번 생각하게 만든다.


흔히 갑과 을의 관계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을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갑이 되는 꿈을 꾼다. 하지만 갑 역시도 을의 자리에서 처세해야 하는 경우, 또한 을 역시 드물게 갑이 되는 위치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자 무명에 가까운 감독 민수와 물려받은 재산으로 넓은 집에서 유유자적하며 살고 있는 여자 주원과의 관계를 보면 갑, 을 관계의 애매함이 보인다. 얼핏 보면 이들은 분명히 갑과 을의 관계로 보인다. 그런데 시작은 그렇지 않았다. 주원의 몸을 보면서 영감을 떠올리고 싶어했던 민수와 그런 민수에게 유혹적 자태로 그를 홀리는 주원은 돈이나 권력이 아닌 성적 취향으로 엮이게 된다. 어쩌면 단 한번도 그런 경험을 겪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가학과 피학의 관계에서 이들은 서로를 탐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갑과 을의 관계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매저키즘의 세상에서 이들이 연인으로 행세한 것도 아니었다.


이 영화가 매저키즘의 본질을 보여주는 장면은 생각외의 장면에서 발견된다. 주원이 밖에 데리고 들어온 남자, 그는 마초적 분위기를 잡고 우락부락한 외모를 가지고 있다. 한번은 주원이 채찍을 남자에게 넘기자 그 순간까지 분위기를 즐기던 민수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더 이상 매저키즘의 당사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는 선언이었다. 또 주원의 집에 일하는 가정부로 들어온 젊은 여자와 민수의 관계는 또 하나의 갑과 을의 관계로 보인다. 즉, 주원과의 관계에서는 굴종이지만 민수는 그 젊은 여자를 통해 같은 방식으로 굴종을 안겨주려고 한다.


이렇게 네 사람의 관계 속에서 열렸다 닫히는 새디즘과 매저키즘의 반복은 인간 본성을 얕은 심도에서 건드려 보는 것으로 이 영화는 스스로 만족하는 듯 싶었다. 수시로 바뀌는 주원의 옷차림, 그리고 유난히 동물의 외피에 집착하는 듯한 모습은 인간이 품은, 외적인 이중성에 대한 고발처럼 보여졌다. 추위와 아름다움을 위해 인간에 제공되는 또 다른 생명체의 겉껍데기지만 그걸 벗어 던지면 결국 인간에게 남는 건 자신의 피부일 뿐이다. 그리고 가학의 상징인 채찍을 인간의 피부에 내려치는 동작은 더 이상 벗을 것이 없으니 내 진실임을 알아 달라는 몸부림이었다.


피학적 성욕구자에겐 얻어 맞음으로써 생기는 고통은 또 하나의 쾌락이라고 했다. 멀쩡한 감독출신인 민수가 어쩌다 하루아침에 매저키스트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힘 있는 프로듀서와 투자자에게 마치 알몸으로 발가벗겨진 채 허허벌판에 나서야 했던 그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원은 민수를 향해 굴종을 느끼냐고 여러번 묻지만, 그건 굴종이라기 보다, 쾌락이라기 보다 살아가기 위해 버릴 수도 있는 자존심으로 비춰졌다.


민수가 처음에 원했던 목적인 영감을 얻기 위해서였다면 한 번의 관계로 끝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집에 기숙하는 것처럼 보이고 수차례 놀랄만한 방법으로 주원에 의해 희롱당하는 모습을 보면, 어쩌면 영화 제작과정에서 들어오는 가진 자의 입김과도 같다는 생각이다. 감독은 영화를 찍기 위해, 신인 여배우는 유명해지기 위해 옷을 벗고 본인도 원치 않은 피학적 성욕구자로 전락하는 모습에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참으로 녹록치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 <섬>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서정을 오랜만에 볼 수 있는데, 세월의 흔적을 그다지 느끼지 못할 정도의 비주얼을 보여주었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 (2012)

Venus in Furs 
10
감독
송예섭
출연
서정, 백현진, 문종원
정보
성인, 스릴러 | 한국 | 80 분 | 2012-07-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