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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후궁: 제왕의 첩 - 결손의 트라우마, 광기의 욕망으로 터지다

효준선생 2012. 6. 4. 00:44

 

 

 

 

 

어느 왕조의 킹메이커든지, 가장 이상적인 왕의 자리를 계승하는 방법으로 장자세습을 꼽았다. 嫡子야말로 자신의 유전자를 가장 많이 닮아 선왕이 이룩한 업적을 잘 이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사람마음 같지 않았다. 선왕이 왕의 자리에 너무 오래 앉아 있어 왕세자가 먼저 타계를 하거나, 혹은 장남 콤플렉스등으로 일찍 병사하거나 아무리 따져보아도 동생들 보다 우매했던 이유로 이상적인 바람은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나마 왕위를 이을 차남이라도 있는 경우는 감지덕지했다. 그 마저도 없는 경우는 사촌, 혹은 육촌동생들 중에서 똘똘한 아이를 데려다 왕의 자리에 올리기도 했고 이 정도가 되면 정실이 아닌 서자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졌다.


서자가 왕위의 자리에 오르기란 하늘의 별따기지만 없는 경우도 아니고 문제는 왕의 자리에 오르는 본인보다 그 어미의 출신에 대해 갖은 모략과 중상이 난무하기에 왕위에 올라도 단 하루도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없었다. 혹여 누군가 자객을 보내 암살을 기도하지 않을지, 혹여 수랏상 음식에 비상이라도 타지는 않을지, 혹여 근처에서 비수를 겨누지 않을지 노심초사하기 마련이었다. 거기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어 최고의 자리에 오르고 보니, 외척이 날뛰고, 제 어미는 신분 미천했던 과거의 분풀이 삼아 섭정을 일삼기도 했다.


왕의 자리는 천하를 호령하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녀 남부러울 것이 없을 것 같지만 엄청난 스트레스 역시 곁에 두었음은 역대 왕들의 일상을 들여다 보면 금새 알 수 있다. 해야하는 것에서 간신히 피했나 하면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자신앞에 산처럼 쌓여있고, 구중궁궐의 답답함을 피하고자 하나 자신의 안위가 세상의 안위라며 갇힌 삶을 살도록 했으며, 주지육림도 제 멋이 못되었다. 특히 사대부 여식 중에서 간택된 중전들에게 이들 왕은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이른바 타인에 의해 뽑혀진 그들은 왕자 생산을 목적으로 하기에 대개 박색인 경우가 많고, 간혹 야심이 왕을 능가하여 늘 피곤함을 느끼게 했다.


왕의 발걸음이 닿는 곳에서 문득 욕정이 생기면 궁궐 나인이나 무수리들도 이른바 성은을 입어 왕과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이른바 신분상승의 드문 케이스였다. 사서에 의하면 왕과의 잠자리는 분명한 격식과 차례가 있다. 목욕재계에 방불케 하는 몸수색이 있고, 그 어떤 장식물도 들고 침소에 들어갈 수 없다. 왕의 房事가 있는 경우 내관과 사관들은 왕의 일거수 일투족을 샅샅이 기록해놓는다.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미리 방비해 놓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왕은 거의 유일한 즐거움인 육욕마저도 누군가의 시선 속에 행해지다 보니, 이런 와중에 바빠진 것은 은밀한 비밀통로인 내관들이었다.


자신의 심볼을 거세당한 채 궁궐 생활을 하는 내관들은 중국 한나라와 명나라때 최고의 권력으로 등장한 바 있었다. 심지어 황제의 권위를 능가하여 각종 조서에 황제를 대신해 締結하고, 마치 자신의 지시가 황제의 엄명인 듯 거들먹거렸다. 내관들에겐 후손이 있을리 없기에 자신이 키우던 어린 내시는 장성하여 그 권력을 이어나갔으며, 그들은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고 나라의 운명마저도 좌지우지 한 바 있었다.


영화 후궁 : 제왕의 첩은 바로 이런 실제 역사 속에서 있었던 일들을 각색하여 사극도 꾸미기 나름에 따라 얼마든지 재미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오랜만의 흥미작으로 선보였다. 물론 극의 배경을 단정짓지 않았기에 조선으로 추정이 되는 옷 품새며 분위기만 살렸을 뿐 간혹 중국풍 이미지도 느껴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이 영화는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흔히 미쟝센이라고 부르는 주인공을 둘러싼 배경에 힘을 주기 보다, 그 안을 메꾸고 있는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옴팡진 줄거리 전개에 더 점수를 주고 싶었다.


이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100m를 남기고 최후의 스퍼트라도 하듯 사건의 시작점이 될 서자 출신 왕세자(왕의 이복 동생)의 등극까지 내쳐 달렸다. 그리고도 이내 지쳐 이야기가 산으로 갈 법함에도 주요 인물들의 아기자기 하고도 스릴러적 비밀스러움으로 무장해 바로 뒷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들어버렸다.


앞서도 말했지만 사극에서 주로 등장하는 말타고 창으로 찔러죽이는 스펙타클한 전쟁신 하나 없다. 거대한 수의 문무백관이 왕을 향해 도열하며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쓸데없는 눈요기 장면도 없다. 그야말로 궁안에서 벌어진 일을 내밀하게, 그리고 짜임새 있게 카메라를 들이 밀며 다음 컷을 밀어 붙였다.

종래 사극에선 제 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배우들도 무거운 장식이 주렁주렁 달린 의상이나 소품에 치대어 제 연기를 버거워 하지만 이 영화에선 그런 모습이 부각되지는 않았다. 여주인공인 대비(조여정 분)의 화려한 옷맵시가 눈에 들어오지만 부수적인 것들이다. 영화에선 주가 되어야 할 것은 미술팀, 의상팀이 꾸며주고 입혀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극을 이끌고 나가는 배우들, 자신들의 연기력이기 때문이다.


몇몇 캐릭터들을 맡은 배우들의 전작은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며, 저 배우가 과연 저런 역을 관객의 노파심이나 선입견을 깨고 소화해낼 수 있을까 의구심도 들었지만 예상외로 잘 맞는 옷을 입은 듯 싶었다. 늘 뭔가에 쫒기며 스트레스와 공황장애를 앓고 살았을 법한 왕의 모습, 졸지에 사랑하는 사랑을 잃고 자신의 남성마저도 잃어버린 채 내관으로 살아야 하는 남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병약한 왕의 후궁으로 살아야 했던 여자, 그리고 자신 역시 후궁 출신으로 아들 하나 믿고 권세를 향해 하지 못할 것이 없다고 믿으며 살았던 한 여인등등. 보다 흥미롭게 한 것은 이들이 맞은 캐릭터들이 단편적이지 않고 제법 굴곡있게 그려져서 어쩌면 나중에 돌변할 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하게 했다는 점이다.


어찌보면 그 좁고 음습한 궁궐안에서 서로에게 잡혀 먹히지 않기 위해 생존의 본능을 발산하며 발버둥치는 모습은 그래서 오히려 인간적이었다. 최고의 승자는 가장 센 놈이 아니다. 끝장에 권세를 움켜쥔 자일 뿐이다. 그러나 한 가지, 그렇게 살아남았다고 무한하지는 않다. 자신이 꺾고 올라선 그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현장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누군가가 먼저 세상을 하직했을 뿐이다. 세월은 가고 權不十年에 花無十日紅이라 하지 않았는가. 

 

 

 

 

 

 

 

 

 

 


후궁: 제왕의 첩 (2012)

6.5
감독
김대승
출연
조여정, 김동욱, 김민준, 박지영, 조은지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22 분 | 2012-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