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은교 - 가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질시가 가져온 파국

효준선생 2012. 4. 19. 02:21

 

 

 

 

오롯이 3인이 극을 이끌어 가는 구도의 영화는 세 사람 사이의 균질감이 최고의 필수조건이다. 鼎立의 형태가 어그러지면 극적 효과가 반감되면서 그 중 한 명은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된다. 영화 은교가 바로 3인 구도의 영화다. 나이를 가늠하기 쉽지 않은 늙은 시인인 이적요(박해일 분), 그의 제자임을 자처하는 젊은 소설가 서지우(김무열 분), 그리고 불쑥 하늘에서 떨어진 듯 나타나 두 사람 마음을 빼앗아버린 열 일곱 여고생 한은교(김고은 분).


파주 금촌(실제 로케는 서울속 마지막 시골이라 불리는 종로구 부암동) 자락의 퇴락한 가옥 안, 외부와 완벽하게 차단된 것처럼 보이는 그곳에서 세 사람은 서로에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을 빼앗기 위한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그렇다고 주먹질을 하고 발길질을 하며 피를 보는 격투가 아니다. 그런 듯 아닌 듯 날카로운 신경전과 은폐술을 동원해가며 서로를 교묘히 공략해가는 과정이 흡사 백마고지를 앞둔 군인의 모습처럼 보였다.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아직 완숙한 여자라기보다 성장기에 있는 소녀의 몸에 가까운 듯한 은교에게서 먼저 춘정을 느낀 건 아직도 고목나무에 꽃이 필까싶은 늙은 시인 이적요였다. 그에게 욕정이라는 말은 거북하다. 늘 고매한 싯구절로 세상사람은 혹하게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딴 문학관 건립이 추진되는 그에게 일차원적 욕구인 성욕이라니, 반려자도 없이 지는 석양에 비유할 수 있는 그에게 찾아온 늦은 가슴 떨림은 어떤 차원이었을까? 바람에 살포시 들춰진 하늘거리는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속살들, 유백색 살빛이 그의 눈에 들어왔을 때의 형형함. 헤나 문신을 그려주겠다며 처음으로 스킨십이 있던 때 그의 상상 속에서 펼쳐지던 놀랄만한 자태들. 이 모든 게 소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아프로디테의 후예다움이라면, 그건 그 어떤 남정네들이라도 같은 반응을 보일 것이다.  


서지우는 은교에게서 공대생이라는 놀림을 받는다. 별의 시적의미도 모르는 녀석이라며 늙은 시인은 그를 타박한다. 소설<심장>으로 대박행진을 터트리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엄청난 고료를 챙겨가는 그에겐 해소되지 않는 갈망이 있다. 바로 스승이자 양아버지라고 생각해온 이적요의 천재적인 글 솜씨였다. 청출어람이라는 말은 그들 관계에서는 통용되지 않는다. 막말로 서지우는 이적요의 아바타요, 껍데기일 수 밖에 없다. 이적요가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터트린 대사는 “이제 자네만의 글을 써보게”였다. 이적요에게 서지우는 제자이자 언젠가는 내쳐야 할 부담이었다.


은교, 그는 어렵사리 엄마 이야기를 꺼내지만 아빠의 존재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이웃집에 살며 용돈벌이로 이적요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기로 한다. 그녀가 부딪치는 단 두명의 인물, 할아버지 이적요와 선생님 서지우. 그녀는 왜 노인 냄새가 풀풀 날 듯한 이적요의 집에서 머물려고 할까 그녀의 짧디 짧은 교복차림새에서 힌트를 얻었다. 관심을 얻기 위해서였다. 간혹 엄마에게 맞고, 또래 친구도 없어 보이는 그녀, 그나마 말을 걸어주는 두 남자에게 그녀는 아빠의 존재, 오빠의 존재를 느낀다. 그런 장면은 수없이 등장한다.


이제 삼자대면의 이야기를 해보자. 비가 오는 날 밤, 은교는 이적요의 집에 찾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몇 마디 흰소리를 하고는 잠이 들었다. 그들이 간밤에 무슨 일을 했는지 구체적이지 않지만 상상하는 것들은 모두 이적요의 머릿속에 있는 것들이다. 서지우는 말한다. 할아버지와 고등학생의 만남은 사랑이 아니라 추문이라고.


만약, 한 사람이라도 아뿔싸하고 정신을 차렸더라면 이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일찍 종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마음이 어디 그렇던가. 서지우가 이적요의 궤짝을 옮기는 은교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 은교와 차안에서의 가벼운 스킨십을 통해 그는 말했다.

“내가 좋아서 이러는 건가요?”

“외로워서 그래”


“적요(寂寥)”라는 독특한 한자어의 의미는 외로움, 고독함이다. 이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모두 외로움에 치를 떨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평생 꼿꼿한 선비로 살았을 법한 늙은 시인, 잘생긴 외모에 인기작가에 돈도 많이 벌었을 젊은 작가에, 이제 갓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방년 처자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나는 너무 외롭소”라는 타령을 하는 걸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서로에게 탐닉하거나 절취라도 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화 속에선 은교의 처녀성과 순수하면서도 교태어린 몸매에 집착하는 두 남자를 비교해가며 요령있게 그려내고 있었지만 결코 보이는 것만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심지어 두 남자 배우는 전라의 육신을 드러냈고 신인 여배우는 몸을 사리지 않고 치부마저 보여주었지만 그토록 허망한 죽음과 때늦은 깨달음 끝에 이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인간이기에 소유하면서도 잘 드러내지 않았던 질투라는 갈망이 아니었을까 싶다.


즉, 영원한 나의 처녀라는 부제가 민망하지만 이적요와 서지우에겐 은교의 처녀성은 주된 오브제가 아니었다. 이들은 각각 상상 속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은교와 남녀관계를 갖지만 결국은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한, 혹은 상대방의 것이라는 인식하에 저지른 질시와 탐욕의 부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터놓고 얘기하는 사이처럼 언급하지만 결국 나만의 것을 간직하고 싶었던 그들 앞에 이적요가 감춰놓은 미발표 원고 <은교>가 서지우에 의해 세상에 나와버린 뒤, 이 두 남자에게 은교는 서로를 넘어서야 하는 경쟁관계이자 빼앗아야만 하는 목표가 된 셈이다.


물리적으로 이적요는 은교를 취할 수 없는 몸이다. 영화 전반부 이적요가 알몸으로 비스듬히 서있는 모습을 비춘다. 쭈글거리고 검버섯이 오른 피부, 툭 튀어 나온 배, 처진 어깨, 그리고 비록 측면에서의 앵글임에도 보일락 말락하는 남성의 심볼을 볼때 그에게 은교는 성욕을 풀 대상이 아니라 한참을 잊고 있었던 남성으로서의 존재를 되새겨 줄 회춘의 묘약이었던 셈이자 그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의 영감을 준 뮤즈일 뿐이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젊은 서지우는 스승이 감춰둔 원고를 통해 스승에게 은교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것을 남성의 힘으로 빼앗은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두 남자의 알력사이에서 은교라는 가냘픈 여성성이 일방적으로 농락당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은교는 관심받기를 원했다. 그녀의 대사 중에서 “내가 이렇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말은 이를 반증한다. 내놓은 딸내미로 만족해 하던 그녀는 존경받는 시인과 각광받는 소설가가 자신을 모델로 글을 썼다는 사실에 반색을 했고 그녀가 가진 거의 유일한 무기인 청춘으로 그들에게 주동적으로 화답한 셈이다.


영화 은교는 비주얼 측면에서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적지 않았다. 잘못했으며 롤리타 계열의 치정멜로로 둔갑할 뻔한 스토리를 마치 미스테리 스릴러 풍으로 만들어 관객의 호기심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 것은 연출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런 말들을 할 것 같다. 생각보다 야했다 혹은 야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평만으로 이 영화를 가위로 뚝 잘라 재단하기엔 쉬운 일은 아닌 듯 싶었다. 굳이 박범신 원작의 소설<은교>와 비교해가며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도 없다.


처음 언급한 것처럼 이 영화는 3명의 배우의 균형감이 생명인 영화였다. 서로의 연기 경험도 다르고 달려왔던 마당도 다르다. 게다가 홍일점 여배우는 완전 신인이다. 그럼에도 적절하게 힘의 안배를 해가며 완주해낸 모습이 만족스럽다.


이제 은교를 보내야 할 때다. 바람처럼 왔다가 봉합이 아닌 파국을 만들고 떠나버린 그녀, 어쩌면 그녀 은교는 원래 없던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의뭉스러웠던 스승과 야멸치지 못했던 제자 사이의 에피소드에 심적 갈등으로 존재했던 무형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더욱 긴장감을 갖고 보게 된 부분은 은교와 두 남자 사이의 맺고 끊음이 아니라 스승과 제자 사이의 갈등과 대치 상황이었다. 


아...오랜만에 부암동에나 가보고 싶은데, 내 집이 아니니 쉽게 찾기는 어려울 것 같다. 대신 시나 써볼까 이적요 선생처럼. 다른 이를 위해서가 아닌 나만의 시를.

 

 

 

 

 

 

 

 


은교 (2012)

6.1
감독
정지우
출연
박해일, 김무열, 김고은
정보
로맨스/멜로 | 한국 | 129 분 | 2012-0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