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건축학 개론 - 첫사랑은 그냥 가슴에 묻어 둡니다.

효준선생 2012. 3. 16. 11:36

 

 

 

 

뇌리 깊숙이 박혀 있어 절대 지울 수 없는 첫사랑의 추억을 누군가의 노크에 의해 끄집어내진다는 건 어떤 기분이 들까? 성인이 되서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찾아온 첫사랑의 설렘, 같은 길을 걷는데도 그와 함께 걸으니 칙칙한 포장도로가 꽃길처럼 느껴지고 지루하기 짝이 없던 학교언덕길이 에스컬레이터가 깔린 무빙워크처럼 느껴진다. 첫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누군가의 고약한 말이 신조가 될 무렵, 하늘은 나만을 괴롭힌다며 주먹질을 해댄다. 다신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15년이 흘렀다. 곁엔 사랑하는 사람이 있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첫사랑의 그,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기는 하는 걸까, 근데 왜 한번도 만나지질 않는 걸까 진짜 그와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지금 사랑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첫사랑의 인상은 심장에 각인이 되어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기에 그렇다.


영화 건축학 개론을 보고 나서 첫사랑이 있었던 사람치고 그 대상을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기억상실증 환자다. “지겨워졌어, 이제 좀 꺼져줄래”라는 모진 말을 마지막으로 헤어졌다고 해서 기억마저 지울 수 없다. 그리고 믿어왔다. 다음 사랑을 만나기 위한 일종의 모르핀같은 것이라고, 그냥 자양분일거라고. 근데 다시 사랑을 잃고 난 뒤 느꼈다. 첫사랑을 이루지 못한 죄값이라고, 업보라고.


헤어진 지 십수년, 더 큰 어른이 되고 한 사람은 이혼녀, 한 사람은 결혼을 앞둔 건축가. 제주도에 집을 지어달라는 여자의 부탁에 어색하게 해후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다소 난감하다. 이 영화는 과거 첫사랑의 기억부분과 다시 만난 부분으로 교차해서 보여진다. 90년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불혹 즈음의 중년들에게 불후의 명곡으로 꼽힐 만한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은 이 영화의 코드이자 키워드다.


95학번이라는 설정은 절묘하다. 최루탄 세대와 오렌지족이라는 극단의 계층이 혼재했던 386세대를 지나 어느 정도 자유로움이 캠퍼스에 선물되어진 시점, 그 당시 청춘에게 사랑찾기는 빼놓을 수 없는 기대감이다. 그래서 그렇게 비슷하게들 만났고 그렇게 비슷하게들 헤어졌다. 영화속에선 제대로 작업 걸지 못하는 쑥맥남과 순수녀의 결합이란 설정하은 고속 만남과 초고속 헤어짐에 익숙한 요즘 세대들에겐 불충분한 설득이겠지만 그 시대를 보낸 관객들은 수긍을 했다. “바로 내 모습이다.”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하나의 이어폰으로 나눠 듣고 기차를 타고 교외에 나간다든지, 가벼운 스킨십을 위해 그렇게 많은 심적 갈등을 겪어야 했던 그들, 오늘의 그들에게서도 보여졌다. “그때, 너를 좋아했어지”라는 말이 왜 그렇게 힘들게 나오는 건지, 술기운이라도 의지하고 싶지만 다 큰 어른이 그럴수도 없다.


이 영화가 흡족했던 건, 로맨틱 코미디에서 흔히 범하기 쉬운 엽기적인 화장실 유머나, 공감받지 못할 오버액션등이 없어서였다. 그렇다고 웃기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깨알같은 대사들이 절묘함을 느낄 정도로 귓가에 들리고 그게 하나같이 어색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을 장식하던 여러 가지 데코레이션들, CD플레이어, 삐삐, G“EU”SS 맨투맨, 1기가 도스컴퓨터, 무스, 필름 카메라, 태엽시계, 그리고 당시에 유행하던 몇 가지 비속어들은 추억을 환기하는 중요한 매개였다.


기억에 남는 장면 몇 군데가 있다. 고백하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소년, 하루 종일 기다렸건만 술에 취해 학교 선배와 같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며 엉뚱한데다 화풀이를 하고,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했건만 헤어진 뒤 곱게 화장까지 한 소녀 혼자 그곳에 나타나 한참을 기다리는 모습, 어른이 된 뒤 서로에게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을 하나씩 공유하면서 버리지 못한 채 간직해 둔 장면들.


주인공 남녀는 분명 첫사랑을 오래 그리고 깊이 간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어떤 감정인지, 그리고 그 옛날의 감정을 복기할 수 있어야 하는다는 암묵적 지지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 역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지만 첫사랑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다. 극중 오늘의 “양서연”이 여전히 아름답고 제주도에 십억대의 별장같은 집을 짓고 살 정도로 있는 임자 없는 이혼녀라는 설정에 잠시 혼란스럽겠지만 이루지 못한 첫사랑은 그냥 마음에 담아 두는 편이 좋겠다.


그해 가을 머나먼 이국땅에서 오로지 한곡만 되풀이 해서 듣던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이 영화속에서 흘러나왔을 때도 전율이 일더니만 영화 속 장면을 떠올리며 리뷰를 쓰는 지금도 비슷한 감정이 든다. 영화의 재미란 이런 모양이다.

 

 

 

 

 

 

 


건축학개론 (2012)

8.6
감독
이용주
출연
엄태웅, 한가인, 이제훈, 수지, 조정석
정보
로맨스/멜로, 드라마 | 한국 | 118 분 | 2012-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