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히어 앤 데어 - 짚신도 다 제 짝이 있다는 말

효준선생 2011. 12. 8. 00:30

 

 

 

관악기를 연주했던 남자는 더 이상 악기를 들지 않는다. 악기가 누워 있는 케이스만을 물끄러미 내려다 볼 뿐이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른다. 몸담고 있던 악단이 해체되었는지, 호흡기라도 다쳐 더 이상 연주를 할 수 없는지, 아니면 다른 할일이 생긴 건지. 최소한 세 번째 이유는 아닌 듯 싶다. 방세조차 내지 못해 쫒겨나야 할 처지에 찬밥 더운 밥 가릴 처지가 아닌 듯 싶다. 거리에서 우연히 이사대행을 하는 동유럽에서 온 청년을 만나 일을 도와준다. 알고 보니 세르비아에서 왔다고 한다.


유고 내전으로 세르비아라는 국명엔 전쟁이라는 이미지가 심하게 각인되어 있다. 그런데 그곳에서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머나먼 미국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전언이다. 남자는 그에게서 재미있는 제안을 받는다. 재미있다기 보다 뿌리칠 수 없는 절박한 제안이다. 청년에게나 남자에게나 삶은 고달파 보인다. 돈을 벌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데려오기 위해 그들은 의기투합하고 실행에 옮긴다.


녹색카드와 관련된 이야기는 한때 상당한 인기를 끌었던 영화소재였다. 그런데 영화 히어 앤 데어는 경제적으로 쪼드리는 미국 남자로 하여금 상대적으로 못사는 나라에 직접 가서 위장 결혼을 하고 가짜 배우자를 데려오라는 소재로 되어 있다.


예전 여타 영화와 다른 점은 늘 으스대던 입장의 미국 국적 남자가 이제는 품팔이 신세로 전락한 것이고 돈을 주는 입장은 미국인에서 외국인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이제 그 잘난 미국인에게는 선천적인 신분, 미국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권리뿐이다. 물론 아직도 그 권리의 일부를 얻기 위해 미국에 가려는 사람은 많다. 세르비아의 수퍼주인도 그런 이야기를 한다. 자기 좀 미국에 데려다 달라고. 그런데 그 댓가가 5천달러다.


남자는 겨우(?) 5천 달러를 벌기 위해 머나먼 세르비아까지 가야 했고, 이런 저런 사건 사고로 돈을 받지 못할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영화는 국가간의 편차를 이용해 가며 서로 다른 국적의 남녀가 만나 법의 테두리 안에서 교묘히 줄타기 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 같아보이지만 결국 사랑이라는 두 글자에 방점을 찍는다.


중년 그 이상의 나이처럼 보이는 남자가 세르비아의 어느 중년 부인과 로맨스에 빠질지 어찌 알았겠나. 사랑은 뜻밖에 오지만 그걸 유지하기엔 장애가 너무 많다. 나이도 국경도 문제가 없다고 하지만 이들에겐 상당한 문제가 된다. 늘 막 자다 일어난 것 같이 머리는 새집을 지은채로 세르비아 거리를 활보하는 남자, 그가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 내세울 건 아무것도 없다. 아니, 심지어 택시 운전기사에게 911 사건이 미국인 너희들이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자작한 것 아니냐는 공박까지 들어야 했다.


아메리칸 드림을 위해 자신들의 돈까지 아낌없이 내놓는 이방인들, 그들 사이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일종의 선택을 하는 미국 남자, 돈과 약속 사이에서 갈등하는 남자가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한 엔딩 장면을 보면서 개인의 안녕을 빌어마지 않는 푸근함보다 이젠 모멸감을 선사해주려는 게 아닐까 싶은 정도였다.


감독은 세르비아 출신으로 미국에서 겪었던 자신의 소회를 상당히 많이 반영했다고 했다. 내전의 이미지를 걷어내고 이국에서 주류로 편입하기 위한 작업으로 이 영화가 만들어졌다면, 단순히 사랑하기에 그토록 필요로 하는 돈마저도 포기할 수 있다는 순애보에 감동만 먹기엔 감춰진 키워드가 적지 않은 영화였다.

 

 

 

 

 

 

 

 


히어 앤 데어 (2011)

Here and Th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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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다르코 룬굴로프
출연
데이빗 손튼, 미르야나 카라노비치, 신디 로퍼, 옐레나 므르자, 브라니슬라브 트리푸노비치
정보
로맨스/멜로 | 세르비아, 미국, 독일 | 84 분 | 2011-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