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완벽한 파트너 - 桃色뒤에 숨겨놓은 표절이라는 문제

효준선생 2011. 11. 17. 00:34

 

 

 

 

고위관직자들의 청문회장, 서슬퍼런 국회의원 나리들의 추상같은 질책이 쏟아진다. 그중의 하나, 당신의 논문이 제자의 그것과 토씨하나 다르지 않다. 베낀 것 아니냐?

베낀게 아니라 공동저작이고 교수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것은 관행이다.


관행은 지들끼리의 암묵적 범죄행위에 대한 방조다. 나도 그러니깐 너도 한번쯤은 봐주마. 소위 먹물들의 이런 행태는 그들이 교수라면 제자들에게 전이되는 건 감기 바이러스에 전염되는 것 보다 쉽다. 내가 논문 취득할 때 우리 교수님도 그랬으니 나의 지도학생들의 노고에 내 이름 하나 더 붙이는 게 뭐가 대수냐? 걔네들은 아직 젊으니 더 머리좀 쓰면 될 게 아니냐


플라톤은 이데아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며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은 살면서 투영되는 것들의 재현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여기서 착안해 모든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며 이를 미메시스라고 불렀다.


전과 달리 세상에 뿌려지는 아웃풋을 전달하고 수용하는 과정이 극단적으로 짧아지고 있다. 인터넷 세상이라는 말은 바로 이 창작과 수용의 중간 단계를 없앤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다 보니 더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타인의 것으로 인지하기 전에 마치 예전에 자기가 창작해낸 것처럼 여기게 되는 단계에 이른다.


영화 완벽한 파트너는 중년 남녀와 그들의 자녀간의 크로스 러브를 다룬 도색영화처럼 선전을 하고 있지만 남녀 관계를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원동력은 바로 타인의 컨텐츠에 대한 욕구에 있어 보였다. 다시 말해 건장한 아들을 둔 영화감독이 딸 정도로 보이는 제자에 대한 욕정은 일차원적 성욕 해소 그 이상의 것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반대로 말만한 딸이 있는 중년 요리 연구가가 약관의 나이에 불과한 신입 주방 보조에게 꽂힌 건 새로운 레시피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다시 말해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애들이 보여주는 파릇한 아이디어를 취하는 것은 가을 언덕 길에서 코스모스 하나 꺾는 것 정도로 쉽다. 그런데 애들은 그걸 완숙한 어른들이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는 사랑, 그것도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를 채워줄 대체재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略取, 힘의 논리에 의해 약한 사람을 자신의 수하에 두는 기성세대의 모습은 전형적이다. 교수와 제자, 요리연구가와 주방보조의 관계에서 그들은 권력을 들이 밀면서 관계를 형성했다. 그안에 진정한 사랑이라는 건 부재했다. 영화속 살색 파티가 연신 보여지는 와중에서 그들의 행위가 부분적으로 다소 변태스러울 정도로 과한 것에 눈을 감고 손에 힘을 주었지만 결코 정신적 애틋함까지 포함되어 있구나라고 느낀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연출이 의도했는지 모르지만 캐주얼한 그들의 남녀 관계에서 결국 남는 건 파트너쉽을 빙자한 네 주머니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기에 대한 기묘한 전쟁일 뿐이다.


표절이 넘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이 영화도 군데군데 기시감이 드는 장면이 있다. 두 커플을 같은 비중으로 교차편집을 하려고 애를 쓰다 보니 반드시 있어야 할 부분이 아닐 듯 싶은 노출신이 過多하고 정작 필요한 “왜 창작을 위한 모방이 반드시 잘못된 거냐”에 대한 진지한 물음엔 끝끝내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영화에서 자주 보지 못했던 배우와 신인 연기자들간의 호흡도 그들이 보여주는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에 비해 다소 아쉬운 점이 없지 않았지만 막 내던지는 것 같은 설컹거림은 많아 보이지 않았다. 노출 장면이 많은 걸로 홍보를 하고 있지만 그 안엔 고민을 좀 해봐야 할 메시지도 적지 않다. 관객들도 오로지 벗는 장면에만 눈독을 들인다면 2시간이 잘 안간다는 기분이 들 수도 있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