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고지전 - 아무도 원치 않았던 지옥같은 전쟁

효준선생 2011. 7. 14. 02:06

 

 

 

고대 격투기 시합에서는 한쪽을 숨을 거두어야만 승리를 얻을 수 있는 아주 고약한 룰이 있다고 한다. 죽지 않을 정도만 패 주고 항복을 받아내면 그만일 것 같은데 목숨을 앗아야만 승리라고 할 수 있다니 그건 시합이 아니라 전투인 셈이다. 어찌보면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은 추후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보복을 근원부터 제거하는 것이고 그러지 않고는 승자는 잠시 승리에 도취할 뿐 집에 돌아가 두 다리 편히 뻗고 잘 수 없었기에 불가피한 일일 수도 있었다. 잔혹하다고 할 수 있지만 상대를 죽여야만 내 목숨을 부지할 수 밖에 없다고 모든 사회공동체가 인지하는 세상이라면 불가능한 셈법만은 아니다.


전쟁, 인간이 만든 스스로의 인구 억제책, 가장 비인간적이면서도 인류는 대형 전쟁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단지 이겼다고 한숨 돌리는 것뿐, 보복과 항전은 끊임없이 발발해왔다. 한반도에서도 대략 몇 년에 한번씩은 쉴새없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53년 휴전성립후 지금까지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 없었다는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전쟁,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서는 한번쯤 動蕩을 일삼을 수 도 있는 것. 이들 권력자를 위해 민초와 군인들은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도 할 틈 없이 죽음과 죽임이 난무하는 전장에 내쳐진다. 내 친구가 죽고 내 가족이 살상의 위기에 처했을때 이성적 판단만 하기엔 인간은 너무 나약하다. 고지가 코앞이라는데 멍하니 경치구경할 리 없다. 들고 있는 총을 갈겨대고 수류탄을 투척한다. 누군가 죽었겠지. 그래서 내가 이 지옥같은 전쟁터를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전쟁, 사람들은 휴전이 선포되었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그러나 저 말없는 언덕엔 내가 아는 사람이 죽어 묻혀있다. 그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나. 지금까지 무려 수십만명이 이 언덕 하나를 빼앗기 위해 일진일퇴를 거듭하다 사망했다. 시체를 덮기위해 땅을 파면 그 흙더미안에서는 저번에 묻었던 시신이 드러난다.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은 셈이다.   


영화 고지전은 한국전쟁 마지막 전투라고 할 수 있는 53년 휴전협정 직전의 애록고지를 배경으로 그 안에 주둔하고 있던 악어부대와 인민군 사이의 격전을 토대로 그려낸 전쟁영화다. 하지만 전투를 통한 승리 그 자체에서 희열을 얻는 영화가 아니라 총을 들고 야전에 던져진 수많은 군인들의 이야기와 행동을 통해 과연 전쟁이 남겨놓은 것들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역동적으로 묻고 있다. 수 십명 정도로 보이는 중대원들, 그안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모였다. 각기 역할과 캐릭터들은 다르지만 그들이 타고갈 버스의 종점은 같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역. 아무도 자신의 앞날을 가늠할 수는 없다. 싸우다 보니 “이젠 더 이상 싸우지 않았으면”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비긴 걸로 합시다라는 휴전이 성립되었다고 해서 그들을 태운 사망행 버스는 중간 정류장에 정차하지 않는다.


이 지옥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알아서 제 목숨을 부지하는 길 뿐이다. 언제는 한 번쯤 만난 얼굴인지도 모른다. 누구는 사진으로나마 연모의 정을 품었던 인연이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죽여야 살 수 있는 이 악마의 소굴은 누구의 소유가 되었다는 게 더 중요한 가치로만 남아있다.


휴전 협정서에 싸인을 한 이름이 보인다. 북한 대표 김일성과 미군 대표 클라크 그리고 중공군 대표 팽덕회, 고지전의 주인공격인 그들을 대표하고 지켜주었어야 할 한국 대표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없이 명분없이 산화해 버린 그들의 혼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뿌연 포화가 난무하는 애록고지엔 지금 무엇이 남아있을까.


전쟁, 아무도 제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뛰어들려고 않는다. 그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마치 아무 고통도 느낄 수 없어 몰핀을 맞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대위의 그것과 다름이 없다. 이긴 자도 없고 진 자도 없는 황량한 벌판위에서 깃발 하나가 나부낀다고 해서 전쟁의 승리자에게 박수를 쳐줄 수는 없다. 전쟁의 後果는 그런 것이다. 


작년 흥행작 의형제를 만든 장훈 감독의 꼼꼼함이 여러 군데서 묻어났다. 부상위험도 많을터인데도 실감나는 전투신이 돋보였고, 배우 각각의 캐릭터들도 실감이 났다. 특히 홍일점 김옥빈의 정체는 상당한 쾌감을 준다. 하나의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과 달리 특정 장소안에서 공세와 수세를 오가다 보니 극 전체의 박진감은 다소 미흡하지만 전쟁의 정체성에 대한  이런 저런 물음이 강렬하게 반향되어 관객들에게 전해짐으로써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