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초민망한 능력자들 - 눈빛만 보면 쓰러질거야

효준선생 2011. 7. 6. 00:06

 

 

 

해치워야 하는 상대가 있다. 인간의 몸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상대방의 목을 조르거나 주먹이나 팔꿈치로 수없이 가격을 한다거나 아니면 발길질을 하는 정도다. 웬만해서는 한방에 목숨을 끊을 수 없다. 맹수들처럼 강력한 이빨을 가진 것도 아니고 코끼리나 코뿔소처럼 눌러 질식시킬 거대한 몸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인간은 무수하게 많은 무기를 생산해왔다.

 

칼, 창, 활에 이어 기계식 무기까지, 그 정도면 한방에 눕힐 수 있겠다. 그러나 살상을 해서 상대를 죽인다는 것에 대한 거부도 적지 않았다. 나를 위해, 나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는 상대에게 무력을 행사한다는 것에 대한 반발, 1970년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불어닥친 히피문화도 사실은 월남전에 대한 반전의식과 맥이 닿아 있다. 일각에서는 전쟁터에 끌려나가기 싫어 도피하면서 만든 퇴폐문화라고 천시하는 경향도 있지만 죽이고 또 죽인다고 내가 원하는 평화를 얻는 전쟁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나 그러니 현생을 즐기는 것 만으로도 우린 충분하다는 주의였다.


장발과 콧수염, 청바지와 기타등으로 그들의 문화는 변주해왔고 이웃나라에도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 영화 초(민망한) 능력자들을 보면서 군데 군데 삽입해 놓은 나는 살생을 전제로 한 전쟁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가 읽혔다. 염력이라는 가당치 않는 機劑를 사용해 상대를 무력화시키겠다는 발상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노려보는 것 만으로 멀쩡한 염소가 쓰러지는 것 자체가 우습지만 결국 그 염소에게 내가 부리는 것은 강렬한 눈빛(?)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염소가 죽었는지 안 죽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염소고기를 취하기 위해서는 결국 칼을 들어야겠지만 최소한 내가 피를 보지는 않았다는 일종의 강박에서는 도피할 수 있는 길은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영화속에서 보여주는 일련의 황당한 훈련들은 정상적인 군대조직이라면 있을 수 없는, 길거리에서 “도를 믿습니까?”라는 조직에 끌려가 닦는 수련과 흡사해 보였다. 어찌보면 동양철학을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혼자 도망을 가는 적을 향해 대충 총질을 하는 것을 보면서 아예 자막에도 새겨놓는다. "대략 몇 퍼센트의 신병들은 하늘에다 총을 겨누고 쏘거나 쏘는 시늉만 했다."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이라는 원제를 버리고 초(민망한) 능력자들이란 낯설고도 애매한 제목도 자세하게 새겨볼 만한 의미를 내포한다. 염력을 비롯해 손을 쓰지 않고도 하고픈일을 할 수 있다면 당연히 초능력자라고 할 수 있지만 그게 허튼 소리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때 미군내에서 이런 부류의 훈련을 실제로 했다고도 하니 전쟁에 대한 환멸은 분명 있었을 법하다. 영화속에서 부시가 등장하는 것을 보니 걸프만에서 시작해 아프칸, 이라크전쟁에 이르기까지 늘 지구의 평화는 우리가 지킨다며 설레발 치는 미국안에서 “지겹다, 이제 그만하자”라며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소리없는 아우성이 이 영화에 조지 클루니, 이완 맥그리거, 제프 브리지스, 케빈 스페이시 같은 걸출한 명 배우들이 망가지고 허술한 캐릭터로 나옴에도 흔쾌히 캐스팅에 응했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평화는 싸워서 획득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럼에도 간혹 主戰매파들이 득세해 전쟁을 발발시키고 그 안에서 이득을 취하려 한다. 지구 역사상 단 하루도 전쟁이 없었던 날이 있었을까 싶게 시끄러운 인간들끼리의 전쟁, 강렬한 눈빛에 픽하고 쓰러지는 염소가 과연 무엇 때문에 그랬을까? 염소보다 못한 인간들이 가여워 비웃다 제풀에 넘어진 것은 아닐까? 


시공간이 수시로 바뀌고 한국인 정서에 잘 안맞는 웃음코드 때문에 간혹 웃긴 웃지만 그 웃음이 허공에 날리곤 한다. 유명배우들이 수시로 몸 개그를 하는 것도 즐겁지만 그 안에 담긴 고차원의(?) 철학적 사유를 읽어내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을 투자하지 않음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