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서평]책 읽고 주절주절

서평 일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 - 인생은 또하나의 순례길

효준선생 2011. 5. 13. 01:32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아무리 먼 길을 떠나도 그렇게 두렵지는 않다. 하지만 무려 1,200km의 거리를 오로지 무동력으로 걸어서 주파해야 한다는 것은 삶에 대한 무기력을 타파해야 하거나 인생의 좌표를 재정립하기 위한 동기를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면 정말 쉽지 않을 것이다.


일본 시코쿠의 오헨로, 이른바 자신을 버리는 순례여행으로 잘 알려진 이 코스를 다녀온 기행문이 하나 둘씩 선을 보이고 있다. 지난 1월에 읽었던 남자에게 차이고 시코쿠라니에 이어 이번에 읽은 책은 21세기 북스에서 나온 경민선 작가의 일생에 한번은 순례여행을 떠나라다. 책 모두에서 밝힌 바 작가는 여행을 떠나기 전 상당한 심리적 갈등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현실에서의 탈출이 필요한 상태였고 외국에서 만난 일본인 친구에게 소개받은 시코쿠 도보여행을 결행하기에 이른다.


다른 곳을 돌아보는 여행은 어쩌면 한없이 자애롭다. 도착하면 예약한 호텔이 떡하니 나타나고 낯선곳에서 자신을 기다려주는 가이드가 있고 뭔가 문제가 생기면 도움을 청할 사람이 지천이다. 그러나 시코쿠 여행은 결코 미리 정해놓은 동행이 있을 수 없다.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자신의 처지와 진배없이 스스로에게 왜 이런 여행을 하는지에 묻는다.


모두 88개의 사찰을 돌면서 납경(왔다 갔다는 확인증)을 받고 또 다음 코스를 돌아보는 과정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길위에 덩그러니 버려진 자신과의 싸움이다. 스스로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이 생긴 것이다. 물론 작가는 개인적인 심경을 모두 토로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길에서 만난 사람과의 인연, 그리고 여행과정에서 부딪치는 에피소드등으로 이야기를 채워나갔다.


88개의 사찰에 대한 소개는 그다지 농밀하지 않다. 어떤 곳은 다녀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스킵한 곳도 많다. 그러나 모든 사찰을 꼼꼼이 살피는 여행이었다면 이 책의 부피는 두 배로 늘었을 지도 모른다. 걷기에 주안점을 두었기에 그럴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가이드 북은 아닌 셈이다.


책을 읽다보면 도보여행을 하는 작가와 나를 치환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만약 내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중간중간 험한 길을 대체하는 기차를 타고 싶은 유혹을 뿌리칠 자신은 있었을까 낯선 사람들과 한 방에서 불편한 잠을 잘 수 있었을까.


모두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그녀에게는 이 험한 과정을 하소연할 동반자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그리고 책 말미 일본 본토 여행을 그와 함께 하는 일종의 보너스 트랙을 추가로 실어 놓았다.


말도 통하지 않고 내 몸뚱아리를 혹사하듯 걷는 여행임에도 적지 않은 돈이 들어야 하고 작가의 말처럼 걷다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릴 수 있는 노정, 누군가에게는 경험이 되고 과거의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는 아직도 마냥 타인의 기록을 부러워만 하고 있다. 


작가는 도중에 얻은 우표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좋은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그들에게 자신의 집주소를 적은 우표 붙은 엽서를 선사했다. 귀국한 뒤 한동안 우체통과 즐거운 씨름을 했다는 표현이 좋았다. 그리고 말미에 이 책을 읽고 부러워만 말고 직접적으로 떠날 계획을 세워보라고 권하고 있다. 그렇다 떠나야 한다. 그래야만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