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상실의 시대 - 세 남녀가 조용히 외치는 사랑의 랩소디

효준선생 2011. 4. 25. 02:11

 

 

 

현대인에게 있어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것과 잃고 사는 것에 대한 경계를 만들며 사는 오늘을 상실의 시대라 부른다면 영화 상실의 시대는 지엽적인 문제나마 해결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이 말하는 상실은 중요한 것일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자의적이거나 타의적일 수도 있다.


그들이 줄기차게 말하는 것은 만고불변의 가치, 사랑이다. 좁혀 말하자면 性談論이다. 왜 사랑하는데 잠을 자지 않았으며,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잘 수 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에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시도등이 주요한 맥락이다. 영화 상실의 시대는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을 모태로 가급적 원작의 내용을 잘 살려 표현해 내려고 애를 쓴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활자와 영상은 독자와 관객들이 품을 수 있는 선입견과 상상력을 확실하게 똑같은 분량으로 이분할 수는 없다.


세 친구가 있다. 와타나베는 친구 키즈키가 자살 후 대학에 진학한다. 잊었던 그의 존재는 죽은 키즈키의 여자친구 나오코를 만나면서 재생되었다. 그런데 그녀, 다소 수상하다. 개방적인 스탠스를 취하는 듯 싶다가도 어느새 우울해지는 모습이 영락없이 조울증 환자같다. 그녀와의 하룻밤은 와타나베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또 한 명의 인물, 와타나베의 대학 후배, 미도리는 그에게 조금씩 다가서지만 남녀의 감정 경계 선상에서 넘어오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의 감정은 또 무엇일까


이 영화가 미성년자 관람불가인 이유는 지독한 성애장면이 나와서가 아니다. 대신 그들이 말하는 내용이 마치 여성잡지에 나오는 성적 어드바이스처럼 속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여성끼리 나누는 이야기가 상대방이 남자임에도 상관없고, 다량의 관객의 호불호나 성별과도 관계가 없다. 그런데 하는 이야기들은 그들이 잃어버렸다고 단언하는 것들은 결코 貞操나 處女性과는 관계 깊지 않았다. 진짜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잃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일회성 관계 후 感傷, 그게 과연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단면이 될까.


또 후배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내가 이 밤에 딸기 케이크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당장 사다둘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는 것, 그런데 그가 사온 그게 먹기 싫다고 휙 내다 버리면, 내가 잘못 사왔구나 라고 말해줄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게 사랑이야” 라고 말한다.


한 남자와 두 여자, 그리고 선배로 나오는 한 커플, 그들은 수시로 사랑에 시름겹고 사랑을 테스트 해본다. 정서적으로 지나치다 생각이 들어 불편할 수도 있지만 그런 사랑 다들 하고 살지 않나.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 원곡을 상업영화로서는 최초로 사용했고, 영화화 하기 어려웠던 하루키 원작을 영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많은 독자와 영화팬들이 기대를 걸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 초반 내레티브가 복잡한 점이 없지 않지만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무려 6분에 걸친 녹음이 우거진 산 언덕 산책장면은 일품이다. 세트보다 자연풍광을 많이 잡아내 눈이 시원하다.  


감독 트란 안 훙처럼 초록색을 잘 쓰는 감독도 없어 보인다. 태생이 동남아인지라 화면 곳곳이 마치 동남아 밀림을 헤매는 것 같다. 일본땅과 일본 배우들이 나옴에도 그런 분위기를 얻으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설정으로 보였다. 하지만 영화 말미 설국에서의 몇 장면은 분명 배경은 그에게는 낯선 이미지임에도 훌륭하게 그려냈다. 영상미는 이 영화의 최고의 덕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