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 - 국적보다 예술, 예술보다 인생

효준선생 2011. 4. 18. 01:23

 

 

 

 

영화 마오의 라스트 댄서를 보기전에 모택동과 댄서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혹시 기쁨조라도 키운 건가 싶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이 제목 말고는 다른 제목은 뽑을 수 없었겠구나 할 정도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물론 중국 현대사의 이면을 좀 이해한다면 영화를 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영화의 시작은 1972년이다. 한국에서는 한 독재자의 영구집권 음모가 발발한 해이기도 했지만 바다 건너 중국에서는 모택동을 위시로, 또한 전체주의로 가는 발판을 공고히 다지는 해이기도 했다. 바로 문화대혁명의 한 가운데 서있던 시점이었다. 소위 지식청년들은 사상개조를 목적으로 下放(오지로 가서 노동, 혹은 교육을 하는 일)을 당했던 때였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는 자본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영재 발레리노를 찾는 일부터 보여주었다. 색깔은 좀 다르게 보였지만 그건 기우였다. 그들은 이른바 혁명가극을 완성시키기 위한 소모품이었고 본격 예술과는 거리가 있었다.


영화는 그렇게 산동에서 뽑혀와 북경예술학교에서 발레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리춘신이라는 인물에서부터 시작한다. 배우는 시절에야 스승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배우기만 하면 되었지만 머리통이 커지고 나서는 진정한 발레리노의 길에 대해 조금씩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渡美를 하게된다.


 

발레리노 리춘신은 실제 인물이다. 미국 휴스턴 발레단의 최초 동양인 무용수로 지금까지 적지않은 성과를 거두었고 현재는 공연 도중 만난 호주 출신 무용수와 결혼, 그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영화는 발레라는 순수예술과 내쇼날리즘에 기반을 둔 이른바 이데올로기와의 대립구조 속에서 한 예술가의 인생 일부분을 그가 보여주는 발레 장면과 엮어 그럴 듯 하게 만들어냈다.

영화 블랙스완에서의 발레가 얼마가 멋진 것인지 체득한 바 있고 이 영화에서도 백조의 호수가 일부분 선보이면서 대비가 되었고 그 외 다양한 레파토리를 통해 발레리노의 그것도 참으로 멋지구나하는 느낌을 선사받았다.


국적 선택의 과정은 개인사이기 이전에 중국이 취한 이른바 정책이었다. 다시 말해 영화의 중요 흐름이었던 시대는 문화대혁명의 중반부부터 끝나는 시점, 그리고 등소평이 등장해 개혁개방의 기치를 들던 80년대 초반의 이야기다. 그런즉, 리춘신이 선택한 처신도 거기에 얼추 맞아떨어진다. 만약 그가 미국인 여성과의 결혼을 이유로 미국체류를 결정했다고 해도 문화대혁명이 끝나지 않았다면 그는 아마 강제압송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록 자신이 태어난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고 해도 체류가 가능했던 것은 그만큼 중국 사회가 좋은 쪽으로 변했다는 것을 은유한다. 감독의 재량이거나 유화를 위한 제스쳐일지 몰라도 리춘신의 처신은 결국 이 영화가 중국 현지 상영이 불허된 결정적 사유가 되었다.


그는 어쩌면 자신으로서는 최선의 선택을 한 것 일지도 모른다. 미국에 오기전, 미국은 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수괴로서 지옥만큼이나 낙후된 곳으로 알고 있었을 정도였으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자유롭지 못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유를 느끼게 되고 자신이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재능을 살리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가 미국체류를 결정한 이유중의 하나였던 엘리자베스와의 헤어짐은 그의 사랑 운운이 진심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남는다.


1986년 휴스턴 공연, 이 영화에서 보여준 발레 무대 중 가장 멋진 장면이 등장하고 이윽고 그 무대의 브이아이피 손님이 소개된다. 상상외의 인물이 등장하는 데 그 부분은 상당한 울림을 준다. 발레를 좋아하고 예술은 인생의 절대적인 한 부분이라고 믿는다면 필견의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