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네버 렛미고 - 그들도 우리처럼 숨을 쉰다

효준선생 2011. 3. 30. 02:23

 

 

 

 

1970년대 중반 영국의 시골 학교 헤일셤, 학생들도 적지 않지만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기숙학교처럼 보이지만 학생들에게서는 음울한 기운이 영 가시지 못한다. 아이들을 찾아오는 부모도 없고 겉으로는 죄다 모범생처럼 보이면서도 실상은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과 두려움을 함께 갖고 살고 있다.


영화 네버 렛미고는 일본 작가인 카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영국 톤에 맞춰 각색한 작품으로 장기기증을 위해 맞춤 제작된 복제인간들을 소재로 한 이른바 공상과학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SF영화처럼 로봇과 외계인 우주선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은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지만 그들이 지닌 천부적인 굴레, 그리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 너무나 짧아서 애틋하기만 한 사랑이야기가 어울어진 그야말로 휴먼 감동스토리다.


초반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선생으로부터 자신들의 운명을 전해들은 아이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지독한 이야기임에도 아이들은 담담하게 듣고만 있었다. 마치 별 감흥이 없는 옛이야기를 듣는 듯하게, 오히려 인간인 선생은 그 이후 학교를 그만두고 만다.


아이들은 성장하면서 대개는 어른의 보호와 훈육을 받고 자란다. 가정이나 학교에서 그곳에서 자녀로서 학생으로서 세상을 살며 해야할 일, 하지 말아야할 일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나중에 사회에서 맞부딪칠 수많은 일에 대해 적응을 해 나가는 것이다. 당연히 헤일셤 아이들도 자신은 기증자로서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대해 교육을 받았기에 그토록 순응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세상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믿으며.


그들에게 불행은 자신의 신체 일부를 기증함으로써 발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오히려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에 도망을 치거나 육체적인 항거를 하지 않는다. 그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치는 것으로 족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과의 오랜 만남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게 슬픈 일이다.


누구나 좀 오래 살기를 원한다. 그래서 윤리적으로 지탄을 받아도 누군가의 신체 일부를 이식받아 장수를 누리려고 한다. 그런데 그 기증자가 자신과 똑같은 꼴을 하고 있는 신체 건강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 기증자는 기증과 동시에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그래도 수긍할 수 있을텐가.


기증자로서의 그들, 두 여자와 한 남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랑을 만들어 증명까지 해서 보여주려고 애를 쓰지만 그들의 운명을 거슬리기에는 제한이 있다. 얼핏 보아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시스템의 문제이지만 이 영화는 컨트롤러가 존재하지 않는다. 캐시역으로 나온 캐리 멀리건은 자기 자신이 기증자이면서 간병인으로 나와 관찰자로만 역할을 한다. 정해진 루트를 힘없이 걷는 두 친구를 보면서 쓸쓸해 하는 그녀의 표정은 예술이다.


그녀 역시 정해진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 채 고즈넉하고 처연한 영국의 한 농장에서 조용히 읊조린다. “나도 이제 한달 안으로 기증을 해야 한다.”

누구나 살기 원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생명을 앗아가면서 그래야 하는지, 설사 그런 용도로 만들어진 생명체라고 해도 누구에게 그런 권리가 있는지, 내가 아프면 그들도 아프다는 생각을 한다면, 이 영화 참으로 슬프다.


스크린에 좋아하는 배우가 하나 나온다는 것은 영화를 즐겁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임을 캐리 멀리건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녀의 몸짓이나 표정은 크게 변함이 없다. 그럼에도 그녀는 영화 전반에 흐르는 공기의 질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출중하다. 주연작은 말할 것도 없고 조연으로만 나와도 빛이 발하는 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