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혈투 - 당쟁의 회오리속에서 스러져 간 민초들

효준선생 2011. 2. 27. 01:33

 

 

 

 

원해서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군인이라도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곳이 전쟁터다. 자신과 똑같은 목숨붙이를 날카로운 창과 무기로 살상을 하고 제 목숨부지하기도 쉽지 않은 그곳. 그래서 고래로 전장에 내보낼 때는 소위 명분이라는 게 있었다. 대표적인인 것이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명예를 위해, 간혹 살아 돌아온다는 전제하에 이기고 돌아오면 크게 한턱 얻어낼 수 있다는 그런 조건이면 비장한 마음으로 씩씩하게 행군가를 부르며 나서던 때가 있다.


영화 혈투의 마지막 장면, 신식말로 엣지있게 생긴 청나라 병사들이 죽어가는 조선의 병사앞에서 이런 말을 한다. “재 네들은 죽을 것을 알면서 왜 전쟁에 나온 거죠?” 그 말은 힘센 자기들 앞에서 조선병사들의 무기력함에 대해 호기롭게 말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다음 말이 가슴을 때린다. “명나라 체면을 위해서 위에서 나가라니까 그냥 나온거야”


그리고 수백년이 흐른 지금, 대한민국의 병사들은 누구를 위해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지 모를 그런 위험한 전쟁터에서 총을 들고 있다. 유엔군의 일원으로, 평화유지군의 일원으로 혹은 원전 수출의 댓가로 마치 용병처럼, 속사정은 다르지만 명나라에 잘 보이기 위해 이길 가능성도 없이 청나라에 대적하러 보내진 조선병사의 모습이 투영되어 안쓰럽기만 하다.  


영화 혈투는 패잔병 3인이 피 터지게 싸우는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영화지만 그 안에는 조선후기 당쟁의 후유증을 앓고 있으면서도 외교에서는 여전히 명에는 사대를, 청에는 눈치를 보는 소위 "끼어버린" 나라의 운명을 그리고 있으며, 그 모습은 오늘날 대한민국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음을 그림자처럼 엮어 놓았다.


조선 후기 즈음이면 지금의 중국땅에서는 아마 지구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전제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청나라 강희제에서 건륭제 통치 직전일 것이다. 명나라는 그런 청나라에 쫒겨 저 멀리 남방으로 쫒겨 다니며 명맥만 유지하는데도 오랑캐를 섬길 수 없다며 사대주의를 맹종하고 있으며, 중종이후 생겨난 당쟁의 여파로 내편, 네편으로 나뉘어 싸움질만 하던 당시였다. 이 끝없는 탐욕의 갈등 속에서 의형제나 다름없이 지내던 헌명, 도영은 가족의 원수이자, 이제는 제거해야할 대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쳐 객잔에 도착한 그들, 그곳엔 온갖 납세와 공역에 시달리다 전쟁터로 끌려온 두수가 있었다. 그들 셋은 그 좁고 페허같은 객잔안에서 의심과 질시와 겁박을 병행하며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한다.


영화의 흐름은 객잔안에서의 셋, 그리고 각각의 배역이 회상하는 플래시 백을 교차해가며 보여준다. 이름만 양반인 헌명을 거둔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과 그의 아들. 그리고 예쁘게 생긴 처자를 두고 다투는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리고 결국 출세를 위해 양아버지를 밀고해버리는 헌명. 하지만 그의 행동속에는 또 다른 의도가 숨어있다.


어느 정도 서로의 의도가 밝혀진 뒤엔 무대포로 치고 받는 싸움질이지만 공교롭게도 세명 모두에서 비슷한 정도의 핸디캡을 안겨주고 싸우게 한 것이 재미있다. 눈을 버린 헌명, 다리를 다친 도영, 그리고 한손을 칼에 찔린 두수. 그들의 싸움의 승자는 분명 있었지만 그렇다고 살아남은 자의 인생은 꽃피는 봄처럼 화사하지는 않을 듯 싶다.


속세로 돌아가봐야 그들을 경원시하는 못된 세도가들 뿐일테니 차라리 그렇게 뒷모습을 보이며 멀리 멀리 떠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좁고 한정된 공간을 활용하고 은청색에 가까운 모노톤 때문에 답답한 감을 주기는 했지만 시나리오 작가 출신의 감독은 자신이 잘하는 살살 비꼬는 듯한 사회비판적 내러티브를 배우를 통해 적절하게 배치하는 데 성공한 듯 싶다. 그동안 워낙 센 영화의 각본을 선보였던 지라 이 영화도 단순한 활극으로 치부하기엔 상당한 무게감이 있다. 대신 그 무게감이 일년에 한 두 번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라면 좀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