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서평]책 읽고 주절주절

서평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 - 예뻐지기 위해서라면

효준선생 2011. 2. 4. 00:10

 

 

 

 

 

꽤 오래전 일이다. 중국 여성들의 전족이라는 주제의 발표를 듣고 나서 질문을 하게 되었다. 질문의 요지는 이랬다.

“지금은 전족이 사라졌지만 오늘날 여성의 발을 감싸는 하이힐 역시 또다른 형태와 의미의 전족이 아니겠느냐?”

발표자는 잠시 침묵을 했고 다른 청중들, 특히 여성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 반응은 예상할 수 있었다. 발표때 발표자가 준비해온 슬라이드에는 흉측하게 일그러진 전족의 형태가 여과없이 보여졌고 그 아름답지 못한 발의 모습이 주는 충격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하이힐에 대해 전족과 동일시했으니 그럴만도 했다.

발표자는 머뭇거리고, 주최자는 얼른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말았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발표자였다면 “전족은 타의에 의한 강요된 미적 추구라면 하이힐은 자의에 의한 선택적 미적 추구입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좀 흘러 지금도 거리에서 숱하게 보는 하이힐을 착용한 여성에서 전족으로 고통스러워했던 중국의 전족 여성과 오버랩하게 된다. 그렇다고 직접 물어 보기도 어렵지만 많은 미디어에서는 그런 궁금증을 어느 정도 풀어주기도 한다.

‘물론 발이 아프지만 종아리가 예뻐지고 키도 커보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이런 대답이 가장 많이 나온 답이었다.

그럼 종아리가 예뻐지도 키가 커보이는 효과는 순전히 자기만족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까 여전히 잘모르겠다. 발이 불편하고 심지어 발가락이 휘어지는 고통을 감내하고서라도 그런 위험해(?) 보이는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이유가 단순히 예뻐보이기 위해서라고?


데버러 로우드가 쓴 아름다움이란 이름의 편견이라는 책에는 위에서 언급한 궁금증의 일부를 해소해주는 내용이 실려있다. 여성이(물론 남성도 아름다움을 추구하지만 이 책은 여성을 주체로 삼아 언급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이유와 목적을 사회적, 심리적인 동인에서 찾으려고 애를 썼다.


예를 들어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기위해서는 타인이 정해 놓은 가치관의 범주안에 들어야 하고 대략 타인들의 가치관안에서는 “이런 수준의 미모는 갖춰야 한다.”는 명목이 있다. 사람들은 그렇기에 누군가가 그 범주안에 들었는지 잣대를 들이밀고 만약 그 안에 있다면 새로운 스타의 탄생이라고 박수를 쳐주고 그렇지 않다면 못생긴 게 재주는 있네 라며 질시와 차별적 언사를 서슴치 않는다고 했다. 주체는 여성이면서도 그 여성은 타인들의 가치관과 심미안의 범주안에 들기 위해 무진 애를 써가며 돈과 시간과 노력을 경주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미모가 돈이 된다는 사실에 대해 인지하게 되면서 그건 개인의 아름다움의 추구에서 멈추지 않고 산업이 된다. 지금 상황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과감하게 고쳐라 돈이 얼마가 들어도 성공적인 변신이 가능하다면 시도하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충동질을 하고 있다. 당연히 몇몇 여성이 이런 변신에 성공하며 투자대비 효율을 보여주었다면 그걸 서포트 해준 여러 가지 산업은 호황을 누리게 된다. 물론 후속조치는 여성과 사회 구성원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꾸준히 뒤를 따른다.


그렇다면 성공을 위해 미모를 가꾸려는 여성을 비하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거울 한번 더 볼 시간에 공부했으면 지금보다 더 좋은 학교에 진학했을 것이라고” 과연 그랬다면 그 여성이 좋은 학교에 진학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인생을 살았을까 아니다. 그 여성은 자괴감이나 불안감에 못이겨 숨을 거둘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여성에서 미모를 추구하는 것은 선천적 욕구인가 이 책에서는 주로 사회적인 동인에 대해 메스를 대고 있지만 그건 수 천년동안 내려온 “예쁜 것들이 득을 보고 있다”는 본능적인 관찰이 유전자를 통해 전해진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것에 대한 추구는 사회적 동인이 주로 작용하는 것이 맞다.


예를 들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을 보면서도 전문가가 아닌 이상 그것이 이쁘다, 밉다는 구분을 하기 쉽지 않다. 못생겼다고 보이는 시추라는 강아지도 귀엽다는 판단하에 많은 애견가의 사랑을 받지 않는가. 그런데 유독 인간, 특히 여성에게 아름답다는 잣대를, 그것이 아주 강력하게 들이민다는 것은 그 어떤 법전을 통해서도 내릴 수 없는 처벌과도 같은 것인지 모른다.


인간의 사리판단이 존재하는 한 인간이 인간에 대한 美醜의 판단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름답지 못한 것들에게 아름다워지라고 강요하는 것도 그것이 비즈니스라는 명목하에 돈이 되는 한 어쩔 수 없는 진화의 모습이다. 아름다움은 단지 가죽 한거풀의 차이라고 강변하는 사람에게도 그러는 너의 마음 속에도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저렇게 둘러댈 것이 틀림없다. 왜? 사람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런 말을 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아름다워 지려고 애를 쓴 것을 敬遠視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타인의 눈에 들기 위해 그 스스로가 불행지거나 고통을 받는 미적추구는 이제 그만둘 때도 되지 않았나. 여전히 그걸로 밥 벌어 먹고 사는 경우가 아니라면 말이다.


전족은 소위 많이 가진 남자의 변태 성욕적 미적 추구에 의해 길들여진 여성의 고통에서 출발했다. 여성해방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전족 폐지가 환영을 받았지만 일부는 그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는 여성도 있었다고 한다. 하나의 관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주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아름다움은 좋다, 하지만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이 사회적 편견이 되어 오로지 외모 하나에만 치중된다면 그것도 옳은 것은 못된다. 세상엔 시각적으로 아름답지 않은 것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