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트론 - 격자무늬에 갇힌 유토피아에서

효준선생 2011. 1. 3. 01:01

 

 

 

1999년 밀레니엄이 다가오는 겨울, 가수 유영석은 전대미문의 가사로 된 노래 하나를 들고 우리들 앞에 나타났다. 노래의 제목은 네모의 꿈이다.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지나 네모난 학교에(후략)


어떤가 제목 그대로 네모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기발하기도 하면서도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의 모습을 그대로 적시하고 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전혀 변함이 없다. 그럼 100년전에도 이랬을까 최소한 조선땅에서 만큼은 이렇지 않았을 것 같다. 당시 찍은 서울의 사진을 보면 전체적으로 둥글거나 타원형의 이미지를 많이 가지고 있다.


네모, 즉 격자무늬가 주는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딱딱해 보인다. 규격화의 모습이다. 인간미가 적게 느껴진다. 생동감이 덜 느껴진다. 대략 이런 이미지가 연상된다. 유영석도 이런 이미지로 가사를 만든 것일테다.


미래의 공간이 그리드, 바로 이런 격자무늬 틀안에서 제도화 되고 규격화된다는 설정으로 과학자 케빈은 지금 살고 있는 공간과는 다른 세상을 감히 창조하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그는 어린 아들만 남겨두고 어디론가 행방불명된다. 20년이 흐른뒤 성인이 된 아들 샘은 아 아버지가 조작하던 컴퓨터에 손을 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 트론은 인간의 상상력이 어디까지 확대 생산되는 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형광 비주얼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그 작업을 극대화한다. 은빛 찬란한 바이크의 경주모습과 디스크를 가지고 벌이는 서바이벌 게임의 장면들은 이 영화가 비록 SF의 전형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그보다 심오한 철학과 종교관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케빈은 자신의 창조한 공간(그리드)으로 가 있지만 그곳은 그에게는 다시 빠져 나올 수 없는 유배지와 같은 곳이다. 그가 그곳에 마치 가택연금 상태에 놓인 이유는 자신의 아바타와 같았던 클루의 배신때문이다. 그가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보자고 했던 케빈에게 배신당해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는 명확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부차적인 존재에 불과한 또 하나의 자신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것은 동일인물안의 심리적 갈등의 외적표현일 수 있어 보인다. 그것은 독재자의 딜레마다. 대중앞에서는 강철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고독하거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다. 클루의 부하들에게는 소위 충성심이 보이지 않는다. 몇몇 캐릭터에서 보이지만 그들은 자신 앞에 있는 존재의 힘에 의해 아주 쉽게 변절할 수 있는 존재들일뿐이다. 비록 클루가 세상을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무척 불안한 기초를 가진 사상누각에 불과할뿐이다. 2010년 지구상에 그런 독재자가 통치하는 나라는 무수히 많다.


또 하나 이 영화는 종교적 이념에 경도되어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내세에서는 이룰 수 없다고 주장하는 가치들, 인간의 탐욕에 의해 발생하는 각종 전쟁과 질병, 자연재해등에 언급하며 그걸 피하기 위해 선택한 공간이라고 한다. 스스로를 창조주라고 말하며 자신의 명령에 복종할 것이라도 말한다. 구원은 자신과 혹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이뤄질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도 다수 있다.


그리드의 세상은 온통 은빛에 가까운 암흑세상이다. 선과 악의 구분은 오로지 주황색과 하늘색으로 구분된다. 악의 무리들은 (그들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악의 무리라고 생각할 리 없다. 단지 헤게모니 쟁탈을 위해 빼앗아야 자신들이 살 수 있기에 행위할 뿐이다) 주황색의 피겨를 내보이는 데 색채로만 봐도 훨씬 강렬해보인다.


마치 한바탕 꿈처럼 공간을 이동해 가면서 있지도 않은 세상을 다녀오는 이야기들은 각종 판타지물에서도 여러번 보았다. 나니아 연대기와 이 영화를 비교해서 보는 것도 유의미할 듯 싶다. 전자가 아이들의 성장기를 묘사했다면 이 영화는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는 오늘날의 세상을 도피할 수 있는 계기를 도모해보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니메이션 영화도 그렇지만 판타지물이나 SF블록버스터에서 철학이나 이념을 다루는 빈도가 점점 강해지고 있는 추세에 맞춰 영화를 들여다 보는 것도 한 가지 영화관람의 묘미가 될 수 있다. 더불어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그리드 세상으로 가야할 만큼 도피의 대상인지 아닌지 한번쯤은 생각해볼 문제이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