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대지진 - 누가 내 딸을 못 보셨나요?

효준선생 2010. 11. 4. 00:30

 

 

 

 

 

 

 

영화 대지진은 그 제목에 현혹되어 재난 영화로 오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말하려는 본질은 사고로 인해 뿔뿔히 흩어진 가족구성원들이 어떻게 다시 해후할 수 있는지를 조명함에 있다.


사고는 개인에게는 치명상을, 가족에게는 이산의 아픔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노인이 되어버린 홀로된 엄마에게 그야말로 속죄의 부담이 되고 말았다. 단 세 글자 때문에.


1976년엔 중국에 커다란 세 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전 중국 인민의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냈던 주은래 총리의 서거, 곧이은 천안문광장에서의 대규모 시위, 그리고 모택동의 죽음, 마지막으로 북경인근 당산에서의 대지진이 그것이다. 두 가지가 정치적인 것이라면 당산대지진은 자연재해임과 동시에 가장 힘 없는 서민들의 피해가 엄청났기 때문에 더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었다.


혹자는 이 세가지 큰 일을 한데 묶어 현대 중국은 1976년을 전후로 완전히 새로운 중국의 탄생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 해는 10여년을 중국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휩싸이게 문화대혁명의 종국을 알린 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일들 사이에 당산에서의 대지진을 미시적으로 조명한 영화가 바로 펑샤오강 감독이 연출한 영화 대지진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영화에서 지진이 발발하는 장면은 겨우 5분정도 나온다. 그 아수라 같은 와중에 팡떵과 팡다 두 남매의 엄마는 그 중 한명과 구해야 하는 하늘이 원망스런 선택을 했고 결국 엄마는 아들인 팡다를 선택했다. 그러나 죽은 줄로 알았던 딸 팡떵은 겨우 목숨을 부지했고 당시 당산에 구조활동을 왔던 해방군 부분에 의해 양녀로 입양된다.


결국 아버지를 잃은 이들 가족은 아들은 엄마와, 딸은 양부모 밑에서 서로에 대해 모른체 10년 그리고 다시 10년을 살았다. 그리고 다시 만난 2008년, 그해 중국에서는 또 한번에 엄청난 지진이 발생했고 우연히 그곳에서 구조활동을 하다 20년을 헤어졌던 남매는 조우한다.


영화 초반 딸과 아들이 동시 토마토를 먹고 싶어하자 엄마는 한 개 있는 토마토를 동생에게 양보하라며 아들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두 남매가 동시에 폐허속에서 신음하는 순간에도 엄마는 아들을 선택한다. 그때 던진 한마디, “아들을...구해주세요”


엄청난 사고를 겪은 뒤 종종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는 성인이 된 딸에게도 찾아왔다. 그녀에게 인생에서 가장 큰 정신적 충격은 지진을 겪은 것보다. 믿었던 엄마가 죽음의 기로에 선 순간 자신이 아닌 아들을 선택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남녀 평등이 강했던 중국에서도 결국 아들을 선택한 엄마, 그 엄마의 한마디로 20여년 동안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마음속으로 짓누르고 살 수 밖에 없었던 딸, 그녀는 자신이 엄마가 되고 지진현장에서 자신과 똑같은 상황에 처한 아기 엄마를 보면서 마음을 고쳐먹는다.


이 영화는 지진이라는 자연재해속에서 정신적, 신체적 외상을 겪는 신세대, 그리고 자신을 위해 숨을 거둔 남편과, 아내를 먼저 보낸 양아버지를 대비시켜 그들에게 가족이란, 희생이란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게 아님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중국영화에서 오랜만에 보는 휴머니즘의 재발견이자 지금도 어디선가 자연재해로 인한 피해를 이겨내려 하는 이재민들을 위한 다큐 드라마였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시각에서 이들 가족을 바라보았으면 더욱 좋았을 터인데 구조 장면과 헌화장면들에서 약간의 공익에도 신경을 쓴 것은 옥의 티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