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돌이킬 수 없는 - 잘 채워진 단추만큼 답답한

효준선생 2010. 10. 31. 00:55

 

 

 

 

 

 

영화 돌이킬 수 없는 은 최근 한국사회의 병리 현상을 역으로 따져보고 싶어 만든 영화임을 단번에 눈치 챌 수 있었다. 반인륜적인 범죄가 횡행하고 조금의 반성조차 없는 사이코패스의 양산은 왜 갑자기 빈번해진 것일까 그들의 행위는 어디서 시작되었고 또 어쩔 수 없이 반복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 영화는 범죄행각에 대해 단죄를 하자는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범죄가 발생하지만 그 범인이 누군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혹시 만에 하나 우리 스스로가 범인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묻고 있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범죄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범인은 처죽여야 하고 옳지 저 인간이 인상이 나쁘고 비슷한 전력의 전과도 있고 하니 저놈을 범인으로 몰자 바로 이런 동조화가 또다른 범죄를 만들어 낼 수도 있음을 드러낸 영화다.


동조화는 집단 심리와도 맥을 같이 한다. 개개의 의사가 한곳으로 집중되면 그렇게까지는 아니지 않을까 하는 사람들까지도 그 흐름에 휩쓸리게 된다. 무릇 사건심리에만 치우치지는 않는다. 수많은 경제활동, 예를 들어 집값의 상승과 폭락, 주가의 등락등도 인간 심리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동조화가 없다면 애시당초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컴퓨터나 기계가 대신 해줄 수 없는 것들이다.


이 영화에서는 동조화의 모습이 다수 보여진다. 용의자로 몰린 남자의 여동생이 다니는 유치원에 소문이 돌자 하나 둘 아이들이 다니지 않게 된 것, 장례식장에서 사람들이 경찰에게 대들며 “왜 잡아들이지 않냐, 너만 모르고 남들은 다 안다. 그가 범인인것을”...


용의자로 등장한 남자의 모습은 단정하다 못해 답답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범인이 아닙니다. 이래서 저래서"라고 말을 했으면 좋았을텐데도 아무런 행동이나 자기방어를 하지 않는다. 묵묵히 있으면 남들이 자신을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데 경찰들은 그가 범인일 것이라고 단정을 하고 단서, 물증을 찾는데만 주력했다.


범인이 있다면 피해자가 있다. 그리고 피해자 아동의 아버지의 경우 공권력을 믿지 못하고 갈등하고 결국 폭발한다. 그의 행위는 정당했을까 적지 않은 영화속에서 피해자는 법의 정의앞에 범인을 단죄하는 정도로는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런 피눈물나는 절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가는 것이 이미 “나쁜 놈”이 저지른 범죄행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찰에게 잡혀 몇 년 썩게 하는 것보다 피해자가 직접 나서 칼이라도 맞게 하는게 카타르시스를 해결하는데 더 후련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여타 영화와 다른 것은 바로 그런 원수나 복수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용의자로 몰린 세진(이정진 분)이 과연 범인이었을까 그가 범인이 아니라면 제2의 인물이 있었을까 온통 여기에만 신경이 쏠린 틈을 타서 감독은 묻고 있었다. "당신은 사실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기에 그에게 주홍글씨를 덧씌우는 것인가요? 단 한번이라도 범죄의 장면을 보여준 적도 없는데도..."


분명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과거의 잘못으로 치명적인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피해자만이 아닐지 모른다. 잠재적인 가해자라고 낙인을 찍어버리고 그 낙인 때문에 또다른 가해자와 피해자가 만들어지는 현상. 전에 한번이라도 누군가에게 린치를 당해 본적이 있었다면 분노를 갖는 것이 당연하다. 그 분노의 대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 문제이긴 하다. 다들 잘 알지도 못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