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악마를 보았다 - 복수는 치기어린 게임이 아니다

효준선생 2010. 8. 13. 00:32

 

 

 

 

드디어 보았다. 올 여름 최고의 화제작이자 문제작으로 손꼽히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고 말았다.

영화를 한편보고 나면 재미있다 혹은 없다라는 무조건적인 반응이 나와야 함에도 잠시 맥이 풀리고 만다. 이 영화는 재미를 떠나서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악해질 수 있나, 혹은 원래부터 그토록 악할 수 있나를 지독하게도 강렬하게 찍어냈기 때문이다.


늑대와 어린양 신드롬


어린시절 보았던 그림동화책의 내용이 상당히 고어적인 내용을 담고 있음이 속속 밝혀졌던 때가 있었다. 사납고 심지어 공포스럽기까지한 늑대앞에 작고 힘없는 어린양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그림을 보노라면 소스라쳐 간밤에 오줌까지 지리게 한 적도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악마(최민식이 맡은 장씨의 역할을 그냥 악마라고 칭하는 편이 가장 어울린다)의 일련의 범죄는 꽤나 상세하다. 그리고 그게 공포스러웠던 것은 희생자의 몇 분 뒤의 운명이 자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가 보여주는 범죄 행각에는 연민이나 자비란 눈꼽만큼도 없다. 그냥 실행만이 있을 뿐이다.

몇 차례 살해 장면이 이어지는 과정을 잘 살펴보면 반드시 죽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범죄대상으로 잡힌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매력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여성이다. 몇몇은 죽고 몇몇은 살아난다. 죽는 자들이나 죽음에서 간신히 살아난 자들이나 고통은 매한가지다. 오히려 남겨진 자들에게 그 공포의 강도는 더욱 세게 잔류될 뿐이다.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관객들에게도.


살아남은 자에게 악마가 하는 말


악마는 끝까지 자신이 이겼다고 허세를 부린다. 그런데 이 영화가 누군가가 이기고 누군가다 지는 그런 내용은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는 모르는 걸까. 자신의 손끝에 죽어간 자들의 유족들의 분노는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가라앉지는 않을텐데, 그는 끝까지 죽고 죽이는 행위를 일종의 게임이라고 판단한 듯 싶다. 그런데 그 게임의 덫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은 상대편에 서있는 이병헌도 마찬가지다. 여러차례 위기에 몰린 어린양을 구해주고 그는 결코 악마의 마지막 숨통을 끊어놓지 못한다. 지속적인 고통을 주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마뜩찮다. 

일당백에 가까운 무술실력도 뛰어나고 첨단기계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나서 복수를 하려고 나서는 사람치고는 너무나 냉철하다. 그리고 그는 전적으로 악마의 본성을 간과했다. 어쩌면 극형에 처해도 분이 풀리지 못할 “못된” 자들에게 경우에 따라 솜방망이 처벌을 일삼는 현실의 판결기관을 우롱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병헌이 오열하는 것으로 엔딩장면을 마감하지만 그는 결코 승리자가 되지 못한다. 어차피 승부가 있을 수 없는 상황이 모든 상황이 종결된 뒤 허탈감으로 남을 테니 말이다. 그런점에서 최민식이 자꾸 자신이 위너라고 했던 말이 귀에 맴돈다.


왜 이 영화가 불편했나


사람이 죽는 영화는 부지기수다. 홍콩 느와르 영화를 보면 달랑 총 한자루 든 주인공에 의해 수많은 악당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죽어가도 그렇게 무섭거나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죽고 죽이는 게 두려웠던 것은 이미 죽은 자 혹은 죽을 것이 뻔한 자들에게 사체절단이라는 두 번의 살인이 주는 한국 영화에서 자주 접하지 못한 생경함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치 도살장에 걸린 돼지고기가 내장을 다 내놓고 살이 발려나는 것을 보고도 입맛을 다시는 인간들에게 그게 돼지가 아닌 사람이라는 도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둘째, 이 영화의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다. 물론 남성도 있지만 그들은 악마가 조준을 해서 죽은 게 아니다. 그냥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고 악마는 주로 여성들을 노렸다. 여성을 대상으로 끔찍한 일은 현실에서도 충분히 접하고 있다. 신문기사를 통해서 그런 사실이 있었음을 알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정황에 이 영화가 들어서면 몇 배로 신경이 날카로워 질 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여성이 당할 상황이 전개되기 시작하면 관객들은 한숨부터 내쉬기 시작한다. 심지어 “도망가”라며 나지막히 읖조리는 경우도 있었다.


셋째, 혈연을 가지고 고통을 배가시킨다. 아무리 잔인한 살인사건을 목도하더라도 인간은 자신과 관련이 없는 자의 죽음앞에서는 금새 잊혀진 “사건”이 된다. 하지만 희생자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있거나 혹은 피붙이라도 될라치면 그건 그대로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남는다. 이 영화에서 사건의 발생과 확대는 결국 “아는” 사람의 죽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피붙이”에 의한 간접살인으로 종결되었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어떤 장르의 영화인지 제목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악마가 본격적으로 마각을 드러내는 타임이 되기 전까지 숨을 죽이고 스크린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는 들었던 소문을 직접 지켜본 뒤엔 자포자기 심정이 된다. 누굴 응원할 수도 없다. 이병헌이 위기의 순간 나타나 히어로가 되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며 비난을 할 사람들도 제발 이쯤해서 나타나 주렴하고 모두가 동화가 된다. 만약 모든 관객들이 같은 마음이라면 인간은 결코 악마의 본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할 수 없을 텐데...


“누가 악마이고 누가 그 악마를 처단하는 지” 하는 복수극이라 한다면 그건 이 영화의 善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악마는 있어서는 안될 존재지만 악마의 시작이 어디에서 되었는지 설명이 불충분한 상태에서라면 그 악마는 우리 주변에 상존하는 인물이 될 수도 있다. 노란색 학원 버스를 몰고 다니는 평범한 운전기사가 살인마가 되어 그토록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다는 사실, 이 영화는 몇몇 심성고운 사람에게는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가 되지 않을까 싶다.


복수는 결코 게임이 아니었음을 좀더 빨리 알았다면, 그리고 그런 복수를 한다해도 죽은 자가 다시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 악마가 보여준 공포의 행위를 보다 강렬하게 매조지해주지 못함이 안타까웠다는 것. 영화를 보고 나서 나도 새디스트가 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졌다. 공포영화 그 이상의 청량감이 밀려왔다. 절대로 개운치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