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파괴된 사나이 - 원수를 사랑할 순 없다

효준선생 2010. 6. 19. 02:16

 

 

 

한 명의 인물 배역 이상의 가치를 해낸 레어 아이템(k660인지는 모른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는 리뷰쓰기가 좀 쉽지 않다.

그건 분명 숨어있는 그림을 찾아내야 하는데 그 그림을 너무 쉽게 찾을 수 있게 배치했다는 데서 다보고 나서도 내가 제대로 속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 영화 복잡한 나선형 구조는 아니다. 그림으로 따지자면 평면구조에 일직선으로 죽 그은 직선이나 다름없다. 하드보일드 스릴러물에 가깝지만 살이 되는 드라마는 무척 건조하다.

전체적 톤이 회색인데다 요즘 흔한 과한 색보정도 별로 안한 듯 싶어 보였다. 

이 영화에서 주로 드러나는 그림을 찾아내 보니 이런 것들이었다. 기독교와 목사, 클래식과 레어급 오디오, 그리고 유괴범과 父情.

하지만 이렇게 다 찾아보고도 성에 차지 않는 이유란 게 감독이 말하고자 의도로 불충분한 것 같아서다.


요는 이렇다. 어느 영화든지 장치는 없을 수 없다. 특히 결말부분에 최고조를 넣어두는 이런 류의 영화라면 앞부분엔 온통 지뢰나 함정이기 때문에 정신 차리지 않으면 뒷부분에서 이해부득 상태가 되고 만다.

이번엔 지뢰나 함정을 찾아보자. 그는 왜 목사를 그만두었을까 아이를 잃고 사람들 앞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교하는 자신이 초라해보여서?...하지만 그는 이내 수술용품 판매상으로 전업을 한다. 왜 하필 그 직업일까 도리어 아이를 찾아다니는 역할을 이혼한  전 부인이 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아내의 병실모습이 꾸준히 등장한다. 아내의 죽음이 뭔가 단서가 될까?  그것도 아닌 듯 싶다. 그렇게 불쌍한 아내는 아웃한다. 물론 억대의 보험금만 남긴채...


이번에 범죄인 쪽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듯 싶다. 일도 음향사 직원이다. k660이라는 귀한 오디오앰프를 사는데 거액이 필요한 듯 싶은데, 유괴도 그런 목적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면 그를 사이코 패스라고 불러도 무방한 것일까


영화 내내 귀에 거슬릴 정도로 나오지만 그는 왜 하여튼이라는 말 대신 여튼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일까.


이번에 유괴당한 아이를 보자. 5살에 유괴당한 소녀는 13살이 될 때까지 유괴범과 함께 지냈고 심지어 다른 소녀를 유괴하는 현장에서 공범이 되기도 했다. 끔찍한 일이다. 그런데 그 소녀는 유통기간이 지난 것처럼 보이는 설탕을 먹고, 유괴범이 건네주는 돌을 씹어 먹는다. 이 장면은 공포감까지 준다.


속살을 드러내듯 디테일까지 까발리고 숨은 그림을 다 찾아 냈지만 여전히 정답은 아닌 듯 했다. 이 영화의 정답은 바로 마지막 장면, 김명민의 한줄기 눈물이다. 그는 면회를 온 딸의 질문에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이고 눈물을 흘린다.


딸은 묻는다. “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만두지 않고 날 찾았냐고”

아버지는 자책의 눈물을 보인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는 주영수(김명민 분)이 목사직을 그만두고 영업일을 하거나 아내를 잃거나 혹은 유괴범과 대치하고 그 댓가로 감옥에 갔다는 인생역정을 다룬 게 아니다. 물론 나쁜 인질을 잡기 까지의 액션 무비는 더더욱 아니다.


일정 기간동안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어버렸음에도 그냥 잊고 살자며 이혼한 아내에게 냉소적으로 말하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자격을 상실한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그를 “파괴된” 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곰곰이 따져보자며 만든 영화로 보인다.


쉽게 원수를 사랑하자며 다른 뺨 한쪽을 내주자며 뭇 교인들에게 설교하지만 반대로 제 입장이 되어본다면 그게 얼마나 어렵고 이중적 태도인지 알 수 있게 된다.  이 역시도 "파괴된" 인간의 본 모습인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종교적 색채를 띠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특정 종교에 대해 선을 그으려고 애를 쓰지만 굳이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것말고도 우린 얼마나 많은 선전 선동에 혹하며 살고 있나. 그러니 본심을 잃지 않는 삶만이 파괴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바로 영화 파괴된 사나이의 주제가 아닐까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