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일라이 - 서유기와 묵시록이 만났다.(강추)

효준선생 2010. 4. 15. 01:42

 

 

 

 

 

 

 

 

 

리뷰를 쓰기전 아주 아주 오래전에 본 동화 한 구절을 끄집어 내고 싶어졌다.

아주 오래전 어느 나라의 왕이 자신이 아끼던 책의 일부분이 소실된 것을 알고는 백방으로 수소문해서 그 소실된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나라의 소식을 알게 되었다.

많은 금은 보화와 그 책을 맞바꾸자는 제안을 받아들인 이웃나라의 왕은 사신으로 돈 많고 기동력이 뛰어난 자와 그 나라에서 가장 영특한 자 두사람을 보내면 그들에게 각각 한부씩 책을 주겠다고 했다.

이에 왕은 이 조건에 해당하는 두 사람을 동시에 출발하도록 했다. 왕은 두 사람을 보내기 전에 먼저 그 책을 가지고 온 자에게는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고 말했다.

그 나라에서 제일가는 재벌은 부하들과 수십마리의 기마를 이끌고 이웃나라로 향했다. 하지만 영특하기만 한 가난뱅이 선비는 날랜 노새 한마리만 달라고 했다.

동시에 출발했지만 이웃나라에 도착한 것은 당연히 재벌일행이었다. 그들은 가져간 금은 보화를 받은 그 나라 왕의 선처로 며칠동안 돌아갈 생각도 하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흥청망청 시간을 보냈다. 며칠후에서야 도착한 선비는 가지고 간 금은보화도 없었지만 그 나라 왕은 약속대로 원하는 책을 내주었다. 선비에게도 푸짐한 음식과 술이 제공되었지만 모두 물리치고 그는 다음날 노새를 타고 바로 출발했다. 이를 본 이웃나라 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자는 저 친구가 되겠군이라고 말을 했다”


노새위에 올라탄 선비는 며칠동안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책은 선인의 지혜가 담긴 명언집이었다. 읽을 수록 재미가 들린 선비는 어느새 책을 보지 않고서도 줄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드디어 이웃나라와 본국의 경계에 도달했다. 선비가 먼저 출발했음을 안 재벌일행도 곧바로 선비의 노새를 따라잡았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그 경계에는 큰 강이 하나있었는데 그들이 돌아갈 시점에 우기가 닥쳐 물이 불어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재벌일행은 먼저 도착해서 포상을 받을 생각에 책을 실은 마차를 강속으로 전진시켰다. 그러나 하늘의 뜻은 거스릴 수 없었다. 격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책들을 황망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건 선비도 마찬가지 였다. 노새는 강 이쪽에 놓아주고 혼자 맨몸뚱아리로 강으로 뛰어든 선비의 등에는 책이 보자기에 매달려 있었지만 강 저쪽으로 건너고 보니 먹물로 쓰인 그 책은 더 이상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된 것이다.


재벌일행과 선비는 아무 것도 없이 터덜 터덜 본국의 왕을 알현하러 길을 떠났다. 이들을 맞이한 왕은 어떻게 했을까? 재벌일행은 왕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엄한 벌을 받았지만 똑같이 귀중한 책을 훼손시킨 선비는 자신의 기억을 되살려 한글자 한글자 필사를 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왕이 원하던 책이 비로소 완성되었다. 왕이 이내 기뻐하며 그를 높은 관직에 중용했으며 이 소식을 들은 이웃나라 왕도 자신이 예견한 바대로 된 것 같아 즐거워 했다는 이야기다.


동양에서는 오래전부터 책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특히 시대를 잘못맞나 책이 모조리 불태워진 사건들은 역사서에도 기록되어 있다. 또한 수많은 전쟁으로 귀중한 책들이 지금은 찾아볼래야 찾을 수 없는 상태에 있다. 또 불경을 얻고자 그 이역만리 머나먼 곳으로 떠나 고생끝에 구해온 현장법사의 이야기는 서유기로 각색되어 우리들에게 독서의 즐거움을 주고 있다.  


그런데 막상 이 과정에 간과된 것은 책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책안에 담겨진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체화했는지 여부가 훨씬 중요하다. 재미있을 것 같아 사두고 책꽂이 진열한 한 책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읽었다고 책을 덮어 놓고 생각하면 별로 기억이 안나는 나쁜 독서습관을 탓한 적도 얼마나 많은가


영화 일라이는 지구종말이후의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계시를 주고자 하더라도 문자의 기록이 얼마나 소중한 지를 일깨워주는 인상적인 영화다.

물론 물량의 공세를 써서 블록버스터의 흉내는 냈지만 그건 관객들에게 원초적 볼거리를 주기위함일뿐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수없이 많은 “장치”가 감추어져 있다. 그건 주인공에게서도, 그리고 주변에서 보이는 소품에도 들어 있다. 다시 말해 그게 거기에 있다는 암시를 주고 한참뒤에 그 용도를 보여주려고 했으니 그걸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봐서는 다소 밋밋한 로드무비같고, 또 영화 더 로드처럼 진한 페이소스적 영화를 싫어하는 젊은 여성관객의 입맛에는 안맞을지 모른다. 또 후반에 들어서 성경의 내용을 언급하며 구세주의 시종처럼 행동하는 일라이의 언사가 마뜩치 않은 이종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서양인이기에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이해하자 그들이 불교나 이슬람 경전을 위해 그런다면 좀 이상하지 않을까?


또 하나 이 영화는 아주 순간적으로 1초나 될까? 유명브랜드가 지구 종말후 어떻게 소모되는지 비꼬기도 한다. 예를 들어 닭튀김의 대명사 KFC에서 공짜로 나눠주는 일회용 물수건은 일라이의 거시기를 닦는 용도로 긴요하게 쓰이며 대형 할인매장인 K마트의 이미지는 일라이의 가방안에서 뭔가를 포장한 용도로 찰나의 순간 보여진다. 또 모토롤라라는 글씨는 일라이가 가지고 있는 책을 빼앗아 자신이 설교자가 되고자하는 카네기(게리 올드만)가 일라이에게 선전포고를 할때 쓰인 손 마이크의 몸통에 붙어있다.


영화 일라이는 전체적으로 회색톤이다. 늘 먼지가 휘날리고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높은 마천루는 엉망인 상태다. 그렇다고 2012처럼 종말의 그 순간을 화려하게 보여주지도 않는다. 상황은 이미 종결되었고 그 안에서 일라이가 어떻게 기다림의 땅 “서부”로 가는지, 그리고 그가 왜 그곳으로 가는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반전과 아까말한 “장치”들의 해법은 드디어 서부에 도착한 일라이의 모습에서 다 보여준다.

그건 오래된 늙은 구도자의 마지막이자 새로운 시대를 열기위한 계시와도 같은 것이었다. 반전을 설명하기 위해 심지어 배역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복기해주거나 아니면 감독에 의해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거나 심지어 재현을 해보이기 까지 하는 여타 영화와 달리 카메라는 일라이의 다치고 지친 몸을 클로즈업하며 아래에서 위로 훑어 올라간다. 그리고 그의 얼굴, 그리고 그의 눈가에 이르면 관객들은 그제서야 탄식을 하게 된다. 신의 경지에 이른 듯한 액션과 그가 중얼거린 성경구절들이 그가 그토록 지키려고 애쓴 그 책 한권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올해 본 영화에서 가장 인상깊은 원샷 원컷으로 기록해두기로 한다.   


누군가는 지루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은 영화다. 그동안 가방끈 긴 역할을 맡아왔던 흑인 최고의 지성파 배우 덴젤 워싱턴와 악당연기의 최강자 게리 올드먼의 멋진 연기덕이다. 특히 덴젤 워싱턴이 심심치 않게 보여준 엄청나게 빠른 손동작은 반듯이 눈 크게 뜨고 봐야할 놀랄만한 볼거리다.


리뷰를 다쓰고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받은 책이 꽂혀있는 책장을 보았다. 저 책들은 언제 다보나. 선비처럼 외우기는커녕 한번이라도 훑어는 봐야 할텐데 하는 걱정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