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제로포커스 - 그녀의 과거를 알려고 하지 마세요. 다칩니다.

효준선생 2010. 3. 17. 02:03

 

 

 

 

 

 

전후세대 전쟁의 후유증을 가장 먼저 받아내야 했던 사람은 여성이라는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매한가지였다. 거기에 동양적 유교사상이 겹쳐 우리의 할머니, 어머니들은 살아남은 오빠나 남동생을 제 한 몸을 희생해 가며 모진 운명을 한탄하며 견디어냈다. 하지만 그녀들에게 지어진 삶의 굴레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느덧 역사책에서 삭제해야 될 치부로 여겨지고 말았다.


일본이 패망한 뒤 일본은 패전국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하지만 돈과 권력을 남겨둔 기득권층에게는 별다른 변화가 없다. 실권 천황과 군국주의라는 탈만 벗어던졌고 그 대신 그들위에 미군이 군림한다. 양키들의 군화들은 일본의 여성을 나락으로 빠트리는데 그녀들의 치욕은 어느덧 한줄 이야기가 되어 2010년 한국에서 영화 제로 포커스로 만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다시 50년대 일본으로 돌아간다. 데이코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재원으로 그녀의 혼처는 전직 군인이자 순사 출신의 남자에게 정해졌다. 그러나 신혼부부앞에 놓인 인연은 너무도 짧았고 이미 꺼져버린 인연을 되살려보려는 데이코의 추적은 점점 미궁속으로 빠져든다.


영화 제로 포커스는 세명의 여성에 의해 진술되고 묘사된다. 처음에는 데이코에 의해 후반부는 사치코에 의해서다.  이들 세명의 여성은 그 시대를 살던 여성의 입장을 각각 대변하고 있다. 패전과는 전혀 상관없는 도쿄 출신의 양가집 규수, 그 자신이 명문대 재학생이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남동생을 위해 윤락을 해야 하는 여자, 그리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 그야말로 천하디 천한 하층민이었지만 사랑을 믿었던 순수했던 여자, 이 세여자의 운명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마치 뫼비우스 띠처럼 얽혀 들어간다.


남자가 순사였다는 사실은 전체 맥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무런 주권도 없이 미군의 경찰견이 되어 움직이는 그들, 남자는 심지어 도망간 양공주들을 잡지 못했다고 미군에게 얻어 맞기 까지 한다. 이게 바로 패전국 국민의 신세였다. 하지만 그녀들에 비하면 그는 양반인 셈이다. 사치코와 히사코는 윤락촌에서 도망나와 신분상승을 꾀한다. 사치코는 특유의 영민함을 발휘해 벽돌공장 사모님이 되고 히사코는 자신을 구해준 순사출신의 남자와 동거를 한다. 그렇게 행복할 것 같았던 두명의 여자와 남자의 사이에 균열이 생긴 것이 바로 데이코와의 결혼때문이었다.


영화의 전반부는 물론 데이코의 남편 찾아 삼처리지만 그 안에는 추리물의 긴장감은 없다. 중반에 이르러 남편의 형, 그리고 남편회사의 후배동료가 타살되면서 아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용의자가 수사선상에 오르고 범인이 누군지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관객은 이미 영화 시작부분에서 누가 진범인지 어느 정도 알 수 있기에 그것보다는 왜 남자가 오락가락 했는지 그 부분이 알고 싶었다.


해답의 열쇠를 쥔 사치코의 인생역정은 주목할 만하다. 자수성가 스타일에다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 정치인의 후견인이 되었을 만큼 욕망이 적지 않은 그녀였다. 하지만 늘 자신의 과거가 들통날 것이 두려웠다. 어쩌면 전후세대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사람이 유독 그녀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노비가 양반이 되고 창녀가 요조숙녀가 되는, 한바탕 사회적 계급의 회오리는 전쟁이 가져온 필연인 셈이다. 그러니 늘 강박속에서 살았을 그녀는 눈빛마저 형형하다. 오죽하면 마리라는 옛 이름을 듣고 그 자리에 실신하지 않았나


영화는 뒤부분에 오면서 데이코의 진술로 사건의 전모를 너무나 친절하게 설명해준다. 그게 마뜩치 않을지 모르지만 원작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인지라 불가피한 선택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전쟁을 겪은 후 한 사회에서 여성의 변신과 고뇌, 그리고 갈등하는 남자의 처신을 다룬 수작이라고 본다. 긴 러닝타임에 과한 배경음악이 거슬리지만 일본 영화 특유의 디테일은 알아줄 만한다. 시대적 고증에 맞는지 잘 모르겠지만 잘 알지 못했던 그 당시 일본의 생활상을 볼 수 있었던 것도 좋았다.

 

홍보를 위해 전면에 내세운 추리가 치정멜로로 빠진 것은 좀 아쉽지만 영화 전편에 숨어 있는 그녀들의 비명과 한숨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런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