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헝거게임:판엠의 불꽃 - 아무리 몸부림쳐도 부처님 손바닥 안

효준선생 2012. 4. 7. 00:07

 

 

 

 

열 여섯 소녀에게 벌어진 일치고는 너무 엄혹했다. 이제 갓 2차 성징을 지나온 소녀앞에서 놓여진 죽음과의 사투라는 미션은, 소녀에겐 성장통처럼 자고 일어나면 악몽정도로 그쳐야 했으면 좋겠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닥친 인류의 처참한 생존게임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활을 드는 것 뿐이었다.


영화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차있는 드라마였다. 외피는 시대를 가늠하기 어려운 어느 미래의 한 공간, 캐피톨과 12개의 디스트릭트로 나뉘어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분별되어 사는 곳이 존재하던 때, 영화의 여주인공 캣니스는 바로 이 12번째의 디스트릭스에서 살고 있는 가난한 집안 출신의 여식이었다. 그녀의 성장배경은 영화 중간 중간 두어 번에 걸쳐 흑백 플래식백 화면을 통해 출신 성분을 얼핏 알려주고 있지만 지금의 그녀의 지금의 정신적 성향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광산에서 폭발사고로 숨지고 그 때문에 약간의 정신이상을 앓고 있는 엄마와 어린 여동생, 정부에서 배급품을 거부하고 숲속에서 사냥과 채집을 통해 호구지책을 삼는 생활을 영위한다. 그녀 곁에는 대장장이 남자 친구가 있다.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소위 국가는 오늘날의 국가개념과는 좀 다르다. 캐피톨이라는 일종의 중심지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 헤게모니를 장악하거나 정부인사로 보이지는 않는다. 단지 원색으로 꾸며진 옷과 장식품으로 그들만의 바운더리를 만들며 살고 있는데, 문제는 그들이 즐길만한 오락거리를 바로 나머지 디스트릭트에 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차출해 이른바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게끔하는데 있었다.  


인구가 늘어날 때 인구수를 조절하는 방법으로 그냥 마음에 안드는 족속들을 한데 몰아넣고 몰살시키는 홀로코스트 방식이 있지만 소수의 통치자들에겐 다수의 힘의 반란이 두려운 것이다. 대신 가임기에 들어선 소년과 소녀들을 차출해서 그들간의 경쟁을 통해 알아서 도태시키는 것은 일견 용인될 소지가 아주 높아 보인다. 영화에서 이 부분이 상대적으로 부각되는 지점은 하나의 디스트릭트에서 남녀 한 쌍을 차출한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오로지 한 사람만 두게 한다. 결국 같은 디스트릭트 안에서 왔지만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 한다는 논리가 된다. 그런데 게임 콘트롤러는 그 게임의 룰을 깨트렸고 언어도단적으로 들리지만 그걸  “영 러브”라고 일컬었다. 결국 같은 디스트릭트에서 온 두 명의 남녀가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경우, 둘 다 우승자로 간주해 살려주겠다는 것인데, 막판엔 그 룰을 다시 뒤집는 요상한 상황을 만들어 최후의 생존자 둘로 하여금 혼란에 빠트린다.


모두 스물 네 명의 참가자중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죽은 자들은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여자들이었다. 참가자중에 주목할 인물은 루 라고 하는 흑인 여자아이였는데 캣니스의 여동생 나이쯤이었다. 나름대로 살기위한 필살기도 하나 가지고 있긴 했지만 그녀가 오랫동안 살 수 있을거라고 보긴 힘들어 보였다. 오로지 언니뻘 되는 자기보다는 세 보이는 캣니스의 울타리안에 기생하는 것 뿐이라는 걸 본능으로 알았던 것 같다. 둘이 껴안고 노숙하는 장면을 보면서 만약 최후에 저 둘이 남게 된다면, 그보다 잔인한 장면을 없겠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영화의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봐도 최후의 승자는 누구라는 걸 분명 알 것이다. 그보다는 캣니스와 마지막 결사항전을 벌일 인물이 누가 될 지, 그게 가장 궁금했다. 대결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주인공에게 죽임을 당하는 상대는 대략 주인공을 못살게 굴거나 얌체같은 행동을 하는 캐릭터로 고정되고 이 영화는 그 수순을 따른다. 그렇기에 한 사람 한 사람이 죽어 나가는 장면에서 안타깝거나 무섭지는 않았다. 물론 캣니스의 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요인에 의해 죽음의 사신을 맞이한 경우가 많은데, 이 모든 매커니즘이 어른들이 파놓은 일종의 게임 콘트롤러였다면 믿겠는가.


더불어 살기보다 주변사람을 밟고 일어서야 비로소 승자가 되는 것이라는 가르침, 하지만 그래봐야 울타리안의 삶이 행복하거나 영속될 수 없음을 성인이 되면 알게 된다. 캣니스가 화살을 날려가며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고 부상을 입고도 정글을 누비는 장면도 결국 누군가의 모니터 안 세상일뿐이다. 한 번 쏘이면 치명상을 입게 되는 환각말벌이며, 정체불명의 맹수들에게 쫒겨 죽임을 당하게 만들고, 그나마 아이템이라고 갖다 놓은 곳 앞엔 지뢰를 설치해 두었다. 오늘 우리 사회와 무엇이 다른가.


기성세대들도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나이를 먹고 군림하는 자리에 올라왔다. 후세대들을 보호하며 생육시켜 사회를 유지하려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그러나 제한된 재화와 환경조건하에서라면 결국 “못난이”들은 도태를 시켜야 전체적인 사회의 건전성이 담보된다고 믿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마련된 헝거게임은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마치 폐쇄회로 카메라 영상처럼 비춰지고 자기의 아들딸이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죽이는 장면을 목도하면서도 환호를 하게 만든다. 잔인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모습을 따져보자, 유치원부터 시작해 이웃집 아이보다 뒤쳐질까봐 수없이 많은 사교육을 시키고 수많은 경시대회에 참가케 해서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그것도 모자라 늘, 일류, 더 일류만 고집하는 기성세대들, 아이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위해, 무엇 때문에 그런 주입식 교육을 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 자체를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들에게 토론과 서로와의 교류는 시간낭비이자 시험에 안나오는 쓸데 없는 것들처럼 인식되었다.


이 영화를 보면 처음엔 무기를 들고 난코스를 헤매는 모습에서 서바이벌 게임이 연상되지만 조금 더 살펴보면 오디션 프로그램의 그림자를 보게 된다. 한 명이 죽으면 대포소리가 들리고 이해타산에 맞춰 일단 동맹을 맺기도 한다. 하지만 최종 목표는 혼자의 승리, 즉 우승뿐이다. 지면 다음 기회를 노릴 수 없다. 최근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들의 연령이 갈수록 어려지고 있다. 영재 발굴 프로젝트라는 미명하에 극소수의 재주꾼들에게는 인생역전의 발판이 마련되는 것이지만 단 한 명만을 위한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하는 수많은 아이들이 받을 좌절의 기회비용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영화 헝거게임 : 판엠의 불꽃은 추측한 예상 그대로의 우승자를 만들고 일단 쉬어간다. 하지만 그게 마뜩치 않은 최고의 통치자는 다음을 준비하려는 듯 심오한 표정을 짓는다. 살 날이 멀지 않은 것 같은 그의 형형한 눈빛은 대체 누굴 위해서인가. 다음편이 확실히 기대되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허기가 진다. 제목 그대로다.

 

 

 

 

 

 

 


헝거게임 : 판엠의 불꽃 (2012)

The Hunger Games 
7.6
감독
게리 로스
출연
제니퍼 로렌스, 조쉬 허처슨, 리암 헴스워스, 엘리자베스 뱅크스, 우디 해럴슨
정보
판타지, 액션, 드라마 | 미국 | 142 분 | 2012-04-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