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페이스 메이커 - 나는 달린다, 고로 존재한다.

효준선생 2012. 1. 14. 00:44

 

 

 

 

중학교 3학년때 처음으로 오래달리기를 뛰었다. 가을에 있을 체력장을 위한 거라고 체육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거리는 1000m, 달려봐야 맨날 100m였던 것에 비하면 그 10배의 거리지만 당시엔 머릿속에 처음부터 쌩하고 달려서 일등으로 골인해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100m에선 반에서 1,2위를 해왔기 때문이다. 드디어 체육시간, 출발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마자 아이들은 100m 달리기를 하듯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150m까지는 그런 식으로 달렸다. 하지만 250m 트랙을 네 번 돌아야 하는 그 경기에서 한 바퀴 돌고 나자 정신이 다 혼미해지고 입이 바싹 말랐다.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닌 듯 했다. 1000m라니, 대체 얼마나 멀기에...결국 네 번째 바퀴때는 터덜터덜 걸어서 들어왔다. 그때 체육선생은 “장거리는 그런식으로 달리면 안돼”라며 빙긋이 웃으셨다 ‘헉헉헉, 왜 진작 말씀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후로 매일 동네 미군부대 담장을 낀 채 한바퀴씩 달리기를 했다. 초반부터 오버페이스를 할 필요가 없었다. 혼자 달렸기 때문이다. 그땐 정말 내가 마라톤 선수라도 되는 양 싶었다. 체력적으로 내 인생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싶다.


달리기 이야기를 초반에 꺼낸 이유는 영화 페이스 메이커를 보면서 인생 사는 것도 어찌보면 마라톤과도 같은 일일거다. 누구는 청춘시절부터 오버페이스를 해서 지금 지쳐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고 누군가는 슬로스타터라 중년의 나이를 넘겨서야 비로소 빛을 보고 있을 수도 있다. 인생이 42,195km를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라면 난 어디쯤 와 있일까. 슬슬 마지막 스퍼트를 준비해야 하는 30km쯤이 아닐까 하는데.


영화 페이스 메이커는 특출한 한 명의 선수가 최고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제 한몸 희생해가면서 그의 페이스를 조절해주는 일종의 조력자를 말한다. 그런데 남들은 1km달리기도 쉽지 않은 마당에 30km이상을 같이 달려준다는데 정말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자기도 똑같은 선수임에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정신적 부담감이 더 크게 작용할 것 같다. 세상에 선수되자 마자 페이스 메이커를 자임하는 경우는 드물다. 해보다가 이런 저런 이유로 하게된 경우, 다시 말해 지는 해가 뜨는 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주만호, 어려서부터 동생과 살아온 착하기만 한 형, 공무원이 된 동생을 뒷바라지 해온 것에 일생의 낙으로 알았던 그에게 들려온 가슴아픈 이야기 한줄. 그래도 그는 달리고 싶었다. 마지막 레이스, 다리를 다쳐서 이젠 누군가를 위해 보조의 자리도 어려운 입장. 그 마지막 레이스는 완주를 해서 자기 자신에게 선물하고 싶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스포츠 영화의 플롯은 대개 비슷하다. 선발전, 예선전, 결선을 거치는 승부의 세계에 투입되고 그 과정에서 선수들간의 질시와 반목, 오해 그리고 남과는 좀 다른 개인 가정사들. 엔딩에 가서야 그 모든 갈등이 풀리고 최고의 자리, 혹은 최선의 모습을 선사한다는 점. 단체경기의 경기 극적인 효과가 극대화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마라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과의 게임이다. 2시간 가량의 어찌보면 지루할 정도의 내쳐달리기. 하지만 해설자와 캐스터는 그 시간을 잘도 메우는 걸로 봐서는 마라톤은 인간이 만든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이야기가 많은 사연을 담은 경기가 아닐까 한다.


제 아무리 과학이 도입되고 페이스 메이커의 존재처럼 누군가의 도움도 받지만 전적으로 혼자 해결해야 하는 멘탈 스포츠다. 주만호가 예정처럼 30km만 달리고 제 역할에 만족했다면 그가 도와준 뜨는 태양은 과연 1등이 가능했을까? 경쟁자가 없는 레이스는 심심하다. 누군가 옆에서 자신을 자극하고 함께 달려주었을때 기록도 승부욕도 발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주만호는 내쳐 달려야 하는게 맞았다. 동생의 펴든 빨간 우산을 보는 순간, 다리에 쥐가 나서 제 다리에 피를 내려고 깃대를 꺾어 찌르던 그 장면이 바로 30km이후의 장면들이다. 인생의 마지막 스퍼트 지금까지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기복없이 달려왔다면 이젠 스스로의 힘으로 달려야 한다. 에이스이건, 페이스 메이커인건 그래야 몇등인지에 상관없이 행복할 듯 싶다.


오버 페이스의 의미를 알고 나서는 결코 처음부터 빨리 달리지는 않는다. 슬로 스타터라는 말이 더 좋다. 빠른 건 의미가 없다. 방향만 정확하면 된다. 좋아서 하는 일과 잘하는 일과의 차이에서 선택은 고민하지 않는다. 그 어떤 것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백 배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영화 페이스 메이커의 마지막 10분에서 울컥한 기분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영화, 잘 본 셈이다.

 

 

 

 

 

 

 

 


페이스 메이커 (2012)

9.1
감독
김달중
출연
김명민, 안성기, 고아라, 최태준, 최재웅
정보
드라마 | 한국 | 124 분 | 2012-0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