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울충만 리뷰/[영화평Ⅰ]요즘 영화리뷰

영화 러블리 본즈 - 구천을 떠도는 소녀의 원혼은 누가 달래주나

효준선생 2010. 3. 1. 01:07

 

 

 

 

 

 

 

영화 러블리 본즈는 겉으로는 말랑거리는 마쉬멜로우 같은 영화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 보면 동양적 윤회사상과 사후세계를 조명한 묵직한 사유의 영화다.

그안에는 대부분 불교관에서 얘기하는 관념론이 가득한데 이를 피터 잭슨이라는 감독이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영화속 화자는 앞부분만 제외하고는 전적으로 이미 죽은 자의 독백에 의해 전개된다. 이런 구조는 흔치 않다. 다시 말해 죽은 자는 살아서 남겨진 자를 관조하고 그들의 행위에 대해 비록 제어를 하지 못한다 해도 입장바꿔 생각하면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양국가에서는 시신의 유무에 대단히 집착한다. 이미 죽은 목숨이라도 시신만이라도 찾겠다며 혹은 그도 안되면 사자가 걸치고 있었던 옷가지에도 영혼의 잔존을 불어넣으며 그걸을 사자와 동일시 해왔다. 그런데 이 영화 말미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여자아이의 시신은 영구히 찾을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 셈이다.

14살 먹은 여자아이의 생전의 마지막 바람은 남자친구와의 멋진 키스였음을 자꾸 부각한다.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의 몸에 의탁해서(빙의라고 할 수 있는) 결국은 성공해낸다. 그리고는 진짜 먼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여기엔 가족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아빠는 10년 동안 딸의 원혼을 풀어주기 위해 애를 쓰지만 한계에 닥치고, 엄마는 아예 집을 나가 버렸다. 오히려 동생만이 결정적인 단서를 구해오지만 그렇다고 범인이 잡히지도 않는다.

 

러블리 본즈라는 제목의 뜻이 조금씩 치유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하는데 사물의 현존적 부재로 인한 정신적 고통이 상처하나 없이 치유될 수 있을까

그런데도 남겨진 가족들에게 무엇이 남겨졌을까 가출했던 엄마의 귀환이 마치 치유의 상징처럼 보여지는 것도 이상하다. 진범이 어처구니 없게 죽었다는 사실도 피해자 가족들은 알지 못한다.

감독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구천을 떠돌던 사자는 이제 영원한 그곳(?)으로 떠났을 터이고, 비록 시신은 검은 흙탕물속에 쳐박혔지만, 남은 가족들은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할 것이고 범인은 내가 처리했으니 이제 모든 것이 일신한 거 아니냐고. 실제로는 아이의 독백으로 내러티브가 이뤄지지만 그건 감독의 발언이라고...

 

할머니가 아픈 동생을 병원으로 데려다 주는 바람에 목숨을 구해내자 아이에게 말한다. 불교에서는 한 사람을 구해내면 그 만큼 오래살 수 있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는 여자의 독백처럼 틀린 말이 되었다.

저승과 이승의 구분을 짓지 못하고 그 한계에서 갈팡지팡한 종교관, 얼굴과 배경만 서양이지 결국은 어설프게 동양의 철학관을 스크린에 옮기려다 무리수를 둔게 아닌가 싶은 영화 러블리 본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