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범위한 유행성 감염을 의미하는 판데믹이나 접촉성 전염병을 의미하는 컨테이젼과는 좀 다른 차원의 공습이 한반도에 상륙했다. 갑작스런 식욕의 증가와 구갈, 그리고 결국은 물을 찾아 헤매다 영양실조의 소견을 보이며 사망, 바로 영화 연가시의 단초가 되는 죽음의 징후들이다.
많은 수의 사람이 한꺼번에 죽어나간다는 건 죽은 사람보다 살아있는 사람에게 공포다. 확실하게 자신은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깨지고 조만간 병마가 자신에게도 내습할 것이라는 두려움이 그것이다. 내가 알고 있던 사람들의 죽음을 목도하고도 슬퍼할 겨를이 없다는 건, 그만큼 나의 죽음이 가까이 왔음을 인간은 직감하기 때문이다. 연가시라는 기생생물의 공격이 자연 생태계에서 가능한 지 여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동물을 숙주로 삼아 성장하고 결국은 그 숙주 동물마저 궤멸시킨 뒤 자신은 유유히 숙주 동물로부터 빠져나가 성체가 된다는 사실은 정말 가공할 만하다. 그리고 그 숙주가 바로 인체라면, 극도의 두려움은 공포가 된다.
이 영화는 귀신이나 사이코 패스 성향의 살인마가 등장하지 않지만 앞부분에선 상당한 공포감을 조성하는데 성공한다. 거기에 딴 생각은 들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밀어붙이는 힘이 강렬하다. 재난 스릴러 영화로서는 드물게 하등할 것으로만 여겼던 기생생물을 전면에 부각시키며 그들이 인간을 공격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이 순간부터 공포감은 어느덧 사라지고, 기생충 보다 못한 인간들에 대한 분노와 증오로 바뀌게 된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두 축은 소시민의 가정, 그리고 형제애이며, 또 하나는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같은 나라에서 살고 있는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는 악덕 기업주다. 한쪽이 생사의 갈림길에서 고통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 반대편의 인물들은 점점 더 부를 축적해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는 부익부 빈익빈의 구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하부에 깔려있는 변종 연가시의 출현과 관련된 모종의 비밀사항은 엽기적이기까지 했다. 정리해서 말하자면 자연상태에서는 존재할 수 없었던 포유류를 숙주로 하는 연가시의 출현은 결국 인간의 무한한 욕심이 가져온 천벌이었으며, 이를 막아내기 위한 살아남은 사람의 노고는 무모해 보일 정도였다.
김명민이 맡은 가장은 일견 무기력해보이기까지 하다. 연가시에 감염된 가족을 구하기 위해 약을 구하는 장면에서 그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운이 참 나쁜 경우와 자꾸 마주치게 되는데 그럴 때마다 그 약이라는 게 어쩌면 모두를 허탈하게 만들 맥거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그래서 죽을 사람은 죽게 하는 것이더 현실적이었을 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기 전 연가시의 정체에 대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영화에서 소개하는 연가시의 비주얼은 상당히 징그러웠다. 갯지렁이처럼 물속에서 유영하다 사람의 항문과 입속을 통해 들어간다는 모습에서 올 여름 계곡 물놀이는 다 갔고, 이 영화를 보면서 자꾸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면 주변의 눈총을 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영화는 허구임에도, 현실에서 반응이 온다는 건, 그만큼 자연이 자연스럽지 않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늘은 매연과 스모그로 가득차있어 비도 산성비가 내리고 토양은 중금속으로, 물은 각종 녹조와 화공약품의 방류로 마시지도 못하는 우리 주변을 돌아보면, 정말 누구처럼 한탕 챙겨서 이 땅을 떠나고 싶어 하는 게 맞는 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고나니 금수강산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다. 맑은 물, 푸른 산을 자랑하던 우리 땅 위에서 영화가 딱 꼬집어 구체적으로 얘기한 연가시 말고도 또 어떤 유해생물(물질)이 우릴 공격하기 위해 대기 중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연가시 (2012)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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