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봄 - [리뷰] 내 마지막 뮤즈를 위해
어떤 영화? 어느 예술가의 순수했던 시간을 반추하는 아름다운 영화 |
영화 봄, 정말 순수하다. 화학조미료에 길들여진 혀 끝에 자연의 맛을 댄 느낌이다. 시작은 조금 위태로웠다. 불안한 눈빛의 남자 겉으로 보이는 인상만 봐서는 아직 이승과 하직할 나이는 아닌 듯한데, 불편한 모양새가 어쩐지 얼마 남은 않은 삶을 꾸역꾸역 사는 듯 해보였다. 하지만 현실에서 남자의 주변은 안온하다. 넓은 땅뙈기와, 소작농들 역시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많지 않은 가족이지만 지극정성인 아내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그는 행복한 예술가의 범주에 드는 가 싶었다.
조각으로 명성을 얻은 그. 예술 혼을 발산하다 지쳤는지, 아님 유전인지 그의 수족은 불편하다. 한동안 작은 끌조차 잡지 못했고 아니 책 한 장 넘길 힘조차 없던 그에게 인생 마지막 걸작을 남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동안 수많은 모델들이 그의 눈앞에서 명멸했을 법한데 동네 아낙네의 실루엣으로부터 얻은 영감. 예술가는 아무리 딴 짓을 하더라도 영감을 얻으면 하룻밤에도 걸작을 만들어낸다고 하지 않던가.
영화 봄, 과연 이 영화의 연출자가 전직 대통령 암살 작전을 그린 영화 26년의 그 감독(조근현 감독)이 맞는가 싶도록 전혀 다른 풍의 보여줌을 극대화한다. 그가 미술감독 출신임을 유감없이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는지 도처가 수묵화에 풍경화에 인물화다. 주인공이 조각가라는 사실과 어쩌면 감독의 사적인 공간이 겹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화는 시각 청각, 그리고 감각을 아우르는 종합 예술의 결정판이지만 이 영화가 뿜어내는 시각효과는 그 자체가 절묘한 화법을 만들어내고 있다. 죽음을 앞둔, 표현하고 싶은 수만 가지 물상을 눈앞에 두고 말을 듣지 않는 수족,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로 자조하다 어느새 예술보다 삶이라는 말로 자신의 처지를 바꿔 생각하는 그, 그의 눈 앞에 나타난 여염집 아낙의 모습은 진정 그를 찾아온 마지막 뮤즈였을까
이 영화는 어느 조각가와 그의 작품에 영감을 준 한 여인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 놓는 사람은 두 사람이 아닌 조각가의 아내다. 헌신에 가까운, 남편이 누드모델과 한 공간에 있어야 하는 직업을 가진 것을 알면서도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조각상의 피사체를 구해보려 애를 쓴다. 그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반대급부일 수도 있다. 혹은 1969년 경상도 어느 종가 댁의 분위기와는 어울린다. 흐름은 상당히 느린 편이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전혀 없다. 노름꾼인 아낙의 남편이 분위기를 고조시키지만 이 영화는 사건이 강렬한 모티프가 되는 영화는 아니다.
전반적으로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이 무척이나 관조적이다. 사람들이 교수님이라 부르고 남길 것도 많은 그에게 더 이상의 여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생각지도 못하게 찾아온 불꽃같은 마지막 기회가 그에겐 흥분이었을 것이다. 처음 만들었던 전신상보다 아린 손을 자극해가며 겨우 만들어낸 두상에서 그는 아름다움을 보았던 것 같다. 그가 남긴 두 통의 편지 속에 글월들, 그의 마지막 뮤즈는 누구였을까 헤르만 헤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 목적은 인생은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니 아름다웠던 남도의 풍광과 삶에 대한 여운이 많이 남는다.
전작에서 감독과 고생을 많이 했던 배우들이 대거 카메오와 단역들로 출연을 한다. 한혜진, 임슬옹, 배수빈 그리고 진구까지 딱 한 번씩만 등장하지만 그걸 찾는 재미도 쏠쏠하다. 사람들은 이 영화에서 여배우의 노출을 입에 올리지만 그것이 선정적이기 보다 처연했다는 표현이 말이 맞는 듯싶다. 먹고 살아야 했던 시절, 그리고 유명한 조각가의 피사체가 되어간다는 생각. 남편으로부터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공간에서의 정서적 열락(悅樂)같은 것들이 맞물렸기 때문이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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