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또 하나의 약속 - [리뷰] 가족이 바로 증인입니다.
한 줄 소감 : 영화 변호인에 이은 또 하나의 필견작,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
영화 시작부터 투박한 강원도 사투리가 흘러나온다. 상업학교를 나와 한국 굴지의 대기업에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도 가문의, 아니 마을의 영예가 될 정도지만 채 2년도 못되어 딸아이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 부모의 품에 안기게 될 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생사는 하늘이 정한다지만 불의의 불치병은 그저 하늘의 뜻만이 아님을 알게 되고는 그들은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 않도록, 그리고 진정한 사과를 얻어내기 위해 애를 쓴다.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은 한국의 최고 재벌그룹의, 그것도 그 그룹 전체를 먹여 살린다는 제조공장에서 발생했던 연이은 백혈병 환자의 발생과 그 책임소재를 두고 법정공방이 벌어졌던 실제 이야기를 극화한 드라마다. 영화 오프닝 크리딧에 언급된 회사명과 인명들은 모두 허구라했지만 그것들이 어디를, 누구를 가리키는 지는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이 영화는 최근 영화계의 가장 큰 화두인 '아버지로서'를 극대화한 부성애 영화며, 후반부엔 법정 드라마처럼 꾸며져 있다.
한편, 세계 최초로 반도체 공장 노동자의 죽음이 작업장 환경과 관련이 있다며 승소를 한 故 황유미씨의 일화를 기초로 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이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어느 정도 알고 볼 수 있다. 소위 3D직종이라는 공장 근로가 아닌 일반 회사에서 함께 일을 하던 동료가 불시에 다치거나 사망하게 되면 회사는 도의적인 책임 내지는 진정성 있는 위로를 하게 마련이다. 특히 영화에서 언급된 것처럼, 반도체 공정이 수많은 유독성 화학물질을 취급하는 곳이다 보니 그 어떤 곳 보다 직원들의 안전이 최우선시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생산성 제고라는 미명하에 위험한 작업환경에 내몰리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황유미씨처럼 급성 백혈병에 걸린 케이스에 그저 개인적인 불운이라거나 혹은 위로금이라도 더 받아낼 생각에 어거지를 부린다는 그들의 비아냥과 함께 영화에선 돈다발을 흔들어대며 “그래봤자 니들이 어쩔건대” 하는 식의 배금만능주의 역시 대기업의 마인드를 일면 보여주는 장치로 사용하고 있다. 이 부분에 이르러서는 거의 공포 영화와 다름없어 보였다.
이런 구도의 노동자와 사주의 대결은 애시당초 불공평한 일이었다. 강제 퇴직서 작성에, 얼마 되지도 않는 위로금에 심지어 산재신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한 다각도의 겁박에 이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말이 실감이 날 법하다. 그럼에도 이들이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자명하다. 혼자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돈 몇 푼에 입을 다물어 버리는 동안 또 다른 사람들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돈이 챙겨준 당장의 이득보다 더 큰 정신적 자책감이 그들을 짓누를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도둑놈을 신고했더니 신고한 사람부터 조사를 하고, 그리고는 도둑놈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신고자에게 증거를 대라하니, 그렇다면 신고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나 언론이고 법조계고 다들 기업체에서 준 돈과 자리에서 호의호식하는 마당에 어느 누가 그들의 허물을 밝혀내려 애를 쓰겠는가. 애초 힘든 게임이었고 먼저 세상을 떠난 자를 위로할 수 있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지만 지금도 연말이면 매년 최고의 수익을 낸다며 경제신문 일면 톱 기사를 내는 그들의 뒤엔 알면서도 모른 척, 모르면 모르는 대로 묵묵히 일만 하는 노동자들이 있어 가능한 일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몇 년 전 이 회사가 내보낸 또 하나의 가족이라는 캠페인 성 광고를 기억한다면 이 영화가 더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질 것이다. 훈이라는 어린 남자아이를 내세워, 그 회사 제품도 마치 가족의 구성원임을 은근하게 포지셔닝했던 광고, 많은 입소문을 탔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그 가전제품에 들어가는 부품들에 누군가의 고통어린 신음소리가 담겨있다면, 과연 진정한 가족이 될 수 있겠는가.
예전에 계열사 신문만 돌려도 그 회사의 직원이 아니냐며 쓴 웃음을 지으며 농담을 하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라도 해서 한국 최고 기업에 들어가는 게 소원인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제대로 사는 건 자리가 아니라 하는 일임을 이 영화를 통해 알게 되길 바란다. 그리고 누군가의 피눈물이 남의 일만이 아님을, 그래서 스스로의 권리를 찾는 노력도 한달 월급이상으로 중요함을 인지했으면 한다. (양진석의 씨네필 소울)